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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Feb 26. 2020

햇살 아래 강아지 소녀와의 산책

자세히 보니 예쁘고 오래 보니 사랑스러운 다섯 살 꼬마와의 이야기

반쯤은 자신을 강아지라 믿는 소녀 이디와 오늘도  산책을 나갔다.




이디는 여전히 야생 강아지나 길 고양이처럼 멋대로인 때가 많지만, 학년 초와 비교해보면 이제 제법 3번 방에 길들여졌다.

3번 방에서 이디가 흥분하거나 화를 내어 수업 진행이 안 되면 보조 교사 중 한 명이 이디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간다.

쫓겨난 이디와 보조교사는 바깥 테이블에서 책을 읽거나 교실에서 안 한다고 집어던진 학습지를 같이 하기도 하고 종종 교내를 산책하기도 한다.


며칠 잠잠했는데 오늘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소란스럽게 굴더니 알파벳 학습지를 하자니까 성을 내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교실에서 쫓겨난 이디 덕분에 함께 교실 밖으로 나온 나는 이디와 평소처럼 운동장과 놀이터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둘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왜 교실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는지, 교실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럴 때면 너무도 멀쩡하게 잘잘못을 구분하고 순순히 앞으로 잘할 것을 약속하는 이디다.

교실에 들어가면 잊어버릴 약속을 남발하는 이디의 말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아 넘어가 주었다. 




좋은 날씨가 매우 흔한 캘리포니아지만, 며칠 오락가락하던 날이 지난 뒤여서인지 오늘은 유난히 햇살이 좋았다.

파란 하늘에 가끔 바람이 불어오고 햇빛이 참 따뜻했다.

지나가는 애들에게 불쑥 말을 걸고 사납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내가 하는 말에 수그러드는 이디가 고마웠다.

아마도 맑게 빛나는 햇빛이 이디를 부드럽게 만들었나 보다.

내 손을 잡고 꼬물락거리는 이디의 작은 손이 귀엽게 느껴졌다


운동장과 놀이터 주변을 걸어 다니다가 빈 테이블에 잠깐 앉아 쉬기로 했다.

텅 빈 운동장에서 햇빛을 쬐며 앉아있으려니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행복한 기분이 몰려왔다.

테이블에 기어 다니는 개미를 보며 종알거리는 이디가 햇살 아래서 눈부시게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학년초에 셀 수 없이 나를 할퀴고 발로 차던,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들강아지나 길고양이 같던 다섯 살 꼬마가 사랑스러워지기까지는 다사다난한 사건과 험난한 시간들이 있었다.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이런 것일까?

내가 이디를 길들인 것인지 이디가 나를 길들인 것인지..... 아마도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졌을 것이다.

예전에는 온 학교를 뛰어다니거나 화를 내며 발버둥을 치는 이디와 실랑이를 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진 덕분에 이제는 교실에서 쫓겨나도 바깥 테이블에서 책을 읽으며 키득거리기도 하고 운동장을 걷다가 같이 깔깔거리기도 하게 되었다.




낯설고 이상해서 괴상하기까지 하던 누군가도 서로의 인생이 어우러져 굴러가다 보면 조금씩 마음이 스며드나 보다.

낯설고 이상한 부분까지도 서로 이해하게 되기도 하고, 좋은 것 하나 없는 것 같은 사람의 말과 행동 뒤에 숨겨진 좋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나 보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만, 시간을 두고 다가가다 보면 그의 다른 점도 이해되는 순간이 있음을 햇살 속에서 웃는 이디를 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꼬물 거리는 다섯 살 이디의 손을 잡고 걷는데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교보문고 창사 25주년 광화문 글판에 씌어서 더욱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그 시. 


       <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래, 이디야 너도 그렇구나.

매일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니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

너를 더 자세히 보고 더 오래 보아줘야겠다.




난장을 피울 때면 여전히 밉살스러운 이디지만, 오늘 햇살 아래 함께 손을 잡고 산책하던 순간, 이디와 함께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눈부신 햇살 속에 불어오는 바람 사이에서 다섯 살 답게 웃는 이디의 해맑은 얼굴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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