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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Jul 18. 2020

삶이 무료한가요? 무료함이 주는 행복은 무료입니다.

작은 사고 뒤 마침내 찾아온 무료함이 주는 행복에 대하여


주말 내내 넷플릭스를 통해 같이 TV 드라마를 보던 남편이 슬그머니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창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아, 무료해."

나는 남편을 보며 외쳤다.

"안돼! 무료하다고 불평하지 마."


지난 3월,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정부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외출 금지령을 내린 며칠 뒤 생계형 업체를 제외한 사업장들의 문을 닫도록 했다.

그리고 지난달 잠시 규제를 풀었던 주정부는 바이러스 확산세에 다시 매장 문을 닫으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늘어나는 COVID 19 확진자와 사망자의 가파른 확산세와 트럼프 대통령의 기이한 국가경영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의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와 차 한잔 하기도 어려운 상황 속에 몇 달째 살고 있다.

마켓 나가는 것이 외출의 전부가 될 만큼 좁아지는 활동 반경 속에서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것 같은 일상은 사실 답답하고 헛헛하다.


그렇지만 좀 무료하다고 불평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되어 찾아온 외출 금지령으로 인한 집콕은 낯설었지만 다소 설렜다.

분주했던 일상에 집 안에서 지내라고 시간을 주다니, 생애 첫 휴교는 특별한 휴가를 얻은 기분까지 들었다.

현재 미국의 심각한 코로나의 상황에서 돌아보자면 당시 내 기분은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급작스런 휴교령을 받고 집에 온 아이들과 나는 두려운 마음 뒤로 조금 신도 났던 것이 사실이다.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집 안에서 지내는 것이 조금 심심해질 무렵 사고가 터졌다.

청소를 하는데 1층 거실 마루가 질퍽해서 살펴보니 마룻바닥 틈에서 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물샘 사고가 처음이라 당황해서 갈팡질팡하다가 이웃집을 통해 얻은 배관업체로 연락을 했더니 다음 날 아침에 오겠다고 했다.

물이 새어 젖는 부분이 늘어나지 않도록 집에 있는 통을 모아 물을 받은 뒤 수도관을 감갔다.

다음 날 배관공이 올 때까지 바가지로 변기에 물을 부어 넣고 받은 물에 설거지를 하면서 우리 가족은 과장하자면 마치 가뭄에 공중 수도에서 물을 받아쓰는 피난민 같은 삶을 재현했다.


다음 날 배관공이 물이 새는 것으로 짐작되는 1층 창고 벽을 연 뒤, 창고 벽에 있는 파이프에 녹이 나면서 물이 샌 것을 알게 되었다.

잘라낸 파이프를 살펴보니 녹이 난 구멍이 무려 5개였고 그 구멍을 통해 새어 나온 물이 계단과 창고 바닥을 넘어 거실 바닥으로 스며들어온 것이었다.

이십여 년 전 캘리포니아 아래 동네에 한참 집들이 들어설 무렵 수도관 설치를 하면서 중국에서 들여온 값싼 파이프가 대거 사용된 때가 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파이프에 조금씩 녹이 나면서 근래에 파이프가 새는 사고를 겪는 집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우리 집의 현실이 된 것이다.  

동파이프가 녹이 슬어 물이 새다니, 당시 파이프의 재질이 얼마나 허접했는지 알 수 있다.


한국 집은 물이 새면 새는 부분만 고치면 되고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집 내부를 나무로 지은 미국 집은 물이 새면 대형 사고다.

변기나 수도관의 물이 새어 물이 바닥이나 벽에 스며들고 나면 단순히 수도관이나 바닥 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 내부에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벽을 뜯어 젖은 내부의 나무들을 말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도관을 교체한 뒤 젖은 벽과 바닥을 말리기 위해 우리 집 1층 거실과 창고에는 Dehumidifier(제습기)와 Air scrubber(공기 순환기)가 여러 대 설치되었고 집 안은 거대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 찼다.

가족들의 소음에 대한 불평에 비행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하자며 농담을 했지만 24시간 비행기를 타고 있는 기분을 만끽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닷새 동안 소음에 노출되어 있으니 모터 소리 때문에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가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TV를 볼륨 소리도 점점 커졌다.

윙윙 돌아가는 모터 소리에 며칠을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건 생각보다 정신적으로 무척 피곤한 일이었다.

말리는 작업이 끝나서 제습기와 공기 순환기를 치워진 날, 일상의 백색 소음만 존재하는 집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운지 깨달았다.

그러나 평화도 잠깐, 마루를 뜯어내어 바닥의 시멘트가 드러난 거실과 대충 막아놓은 벽과 계단을 보고 있자니 심란한 마음이 밀려왔다.


바닥과 벽이 뜯어진 집에서 지내는 동안 보험회사에서 공사 견적서를 내기 위해 사람을 보냈고, 이런저런 수리 문제로 공사 시공 업체 사람들이 다녀갔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불안한 시국에 외부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여러 결정과 의견 조율의 과정을 거치는 사이 학교는 휴교를 끝내고 온라인 수업에 들어갔다.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는 중이라 주로 집에서 일을 하는 탓에 시간은 여유가 있었지만 보험회사와 공사 업체를 상대하기 위해 소소한 일들을 신경 쓰느라 마음이 계속 분주했다.


마침내 보험회사의 승인이 나서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루 재료상에서 주문한 새 마루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공장 업무와 배송이 지연되어 3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심란한 집이 조만간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공사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저녁, 창고 벽에서 불길하면서 익숙한 물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불행하게도 파이프의 다른 부분이 또 터진 것이었다.

저녁 무렵이라 배관공은 다음 날에나 올 수 있다고 해서 또 집 안의 통을 모아다 물을 받고 수도를 잠갔다.

다음 날 배관공이 올 때까지 다시 가뭄에 공중 수도에서 물을 받아다 쓰는 것 같은 생활이 재현되었다.

배관공이 파이프를 교체한 뒤 다시 수돗물을 틀어 주었을 때, 매우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이었던 수도 시스템이 얼마나 고마운 지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결국 또 벽 내부의 목재를 말리기 위해 또 비행기 소음을 내는 기계들과 사흘을 함께 지내야 했다.

그래도 새 마루를 기다리는 와중에 물이 터졌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말리는 작업이 끝나고 학교 일정을 조정해 바닥 공사 날짜를 잡았는데 일부 물건이 정해진 날짜에 올 수 없다는 통보에 공사 날짜를 다시 미뤄야 했다.

마침내 다시 공사 날짜가 정해졌고 공사에 필요한 물건이 우리 집 Garage(차고)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사보다 힘든 공사를 위한 '이 방에서 저 방 이사'가 시작되었다.

바닥 공사를 쉽게 하기 위해 집 안의 물건을 바닥 공사가 필요 없는 차고와 세탁실, 화장실에 밀어 넣기 시작했는데 여기저기서 물건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이사를 할 것도 아닌데 짐을 옮기기 위해 집을 정리하는 동안 숨겨져 있던 버릴 물건들이 실체를 드러내기도 했다.   

집 전체 마루 교체 작업이 진행되는 이틀을 먼지와 소음 속에서 견디고 나자 걸레받이라고 부르는 Baseboard 페이트 작업이 이틀 동안 이어졌다.

공사 전 짐 정리로 시작되어 나흘간 공사가 진행되었고 그 후 소소한 공사 뒷마무리가 끝난 후에도 구석구석 쌓인 공사 먼지 제거와 집안 물건 정리, 집안 청소로 몸도 마음도 고된 날이 한참을 이어졌다.


다시는 겪고 싶은 않은 물샘 사고 덕분에 코로나로 인한 집콕 생활에서 4개월이 얼렁뚱땅 지나갔다.




휴교 후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어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물 사고 두 번이 터지는 사이에 방학이 시작되었으며 여전히 코로나 사태로 집에 갇혀있었지만, 물 사고와 공사 때문에 마음과 생각이 분주한 탓인지 집콕의 심심함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바닥 말리는 동안은 기계음에 시달렸고 마루를 다 깔고 공사가 끝날 때까지 수시로 공사 업자가 와서 이런저런 것들을 고치고 처리하기 위해 들락거렸다.

게다가 작고 큰 일들로 시공 업체와 보험업체를 상대하느라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를 누리기가 어려웠다.

마루를 뜯어낸 바닥을 볼 때마다 피난민 같은 기분이었고 이어지는 물샘 사고와 나의 계획과 달리 틀어지는 공사 일정 속에서 이 모든 게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다.

어서 깨끗하고 정갈한 집 안에서 아무 걱정 없이 늘어져 있고 싶었다.


장장 사 개월의 물샘 사고와 대대적인 바닥 공사 그리고  '이 방에서 저 방 이사'와 집안 대청소를 마친 뒤, 마침내 모든 물건이 제 자리로 돌아온 깨끗한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말끔해진 바닥 위에 제자리를 찾은 소파에 느긋하게 누워 사 개월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집 안에서 쉴 수 있게 된 첫 주말, 오랜만에 찾아온 일상은 몹시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아도 되는 보통의 일상이 너무 다행스러워서 이래도 괜찮나 슬그머니 겁도 났다.




그런데 4개월 만에 깨끗한 집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콕을 하며 맞은 두 번째 주말, 주말 내내 TV 드라마를 보던 남편이 감히 말한 것이다.

"무료하다"라고.

겨우 두 주 동안 평화를 누리고는 그 새 '어떤 특별한 것도 없는 집콕 생활'이 분이 넘친 것이다.


"아, 지루하고 심심하고..... 삶이 무료하다."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던 남편은 말했다.

"그렇지? 맘대로 다닐 수도 없고, 좀 심심하네."

TV에 눈을 둔 채 대꾸하던 내 머릿속에 번개가 번쩍 지나갔고, 나는 무료하다는 남편을 향해 쏘아댔다.

"여보! 무료한 건 좋은 거야. 무료하다고 불평하지 마. 아무 사고도 없고 아무 일도 없어서 심심한 게 얼마나 감사한 건지 바닥 공사 때를 생각해봐. 또 물이 터지거나 누가 아프다고 데굴데굴 구르는 일이 있으면 좋겠어? 별 일 없어 심심하고 지루한 삶은 좋은 거야. 무료한 건 행복한 거라고!"

남편은 피식 웃더니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그러네. 무료한 게 좋은 거네."




그렇다.

무료한 것은 행복한 것이다.

걱정이나 근심이 있다면 무료할 수 없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쏟아진다면 무료함을 느낄 여유를 가질 수 없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만약에 홍수로 집 안에 물이 들어차거나 집에 도둑이 들거나 혹시나 가족이 코로나 바이러스에라도 걸려서 발을 동동 굴러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수 있고 더 이상 신경 쓰고 걱정할 문제가 없는 일상에 감사하자.

특별한 일이 없어서 오늘도 별일 없이 집콕을 해야 하는 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이자.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지만 지금 심심하고 무료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에 진심으로 감사하자.

삶의 무료함은 행복이다. 그 행복은 무료다.  


아, 무료해서 행복하다.




삶이 무료한 가요?


일상에 특별한 일이 없어서 심심한가요?

당장 내 마음과 생각을 빼앗는 일들이 없어서 지루한가요?

내 삶을 뒤 흔드는 문제나 내 정신을 빼앗아갈 별일이 없는 삶에 감사하세요.


당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사고와 문제는 당신에게 값을 치를 것을 요구하지만

심심하고 지루한 삶이 주는 무료함은 공짜입니다.

무료한 건 행복한 거예요.

그 행복을 공짜로 즐기세요.


무료한 삶이 주는 행복은 무료입니다.

일상의 무료함을 맘껏 누리세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 지금,

지루한 오리배를 타는 기분이 든다면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며 특별한 것 없이 흘러가는 일상에 감사해야겠다.

지금 롤러코스터의 맨 앞에 선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가 느끼는 무료함이 미안하다.

그들 덕분에 나는 오리배 안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




미국 생활 Tip - 집 보험과 보험처리 과정


자동차를 사면 보험을 드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집을 크게 수리해야 할 여러 가지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집보험을 든다.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목재로 지은 집은 물새는 사고에 취약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집보험을 드는 것이 보편적이며 가능하면 집보험을 들어두는 것이 좋다.

특히 인건비가 비싼 미국에서는 물이 새면 집 내부를 말리는 과정과 바닥과 벽공사에 큰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물 새는 사고는 대형사고다.

보험료가 아까워서 안 들었다가 문제가 발생해 개인적으로 공사를 하려면 비용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든다.  


우리는 처음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배관공에게 연락을 한 뒤, 바로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하며 물샘 사고를 신고하였다.

보험회사에서는 사고 접수 후 우리에게 배관공을 불러 필요한 조치를 취한 뒤 수리비를 청구하라고 하였다.

며칠 뒤, 보험회사에서는 사고 상태와 공사에 들어갈 비용의 견적을 내기 위해 직원을 보냈고 이어서 방문했던 직원의 보고를 바탕으로 보험 보장 견적서를 보내주었다.

그 사이 우리는 개인적으로 시공 업체를 통해 공사 과정을 진행했다.

보험회사에서는 서류와 공사 비용 검토를 거쳐 보험료를 수표(Check)로 보내주었고 우리는 그것으로 공사비를 지불하였다.

먼지와 냄새 등으로 집에서 지내기 어려운 공사가 진행되는 일정 기간은 호텔에서 지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보험회사도 있다.

보험사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호텔 숙박 후 영수증을 보내면 호텔 숙박 경비를 수표(Check)로 보내준다.


그동안 매년 내는 결코 만만치 않은 집 보험료가 무척 아까웠는데 이번에 물샘 사고로 대대적인 바닥 공사를 하면서 집보험 든 것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슬픈 현실은 보험 혜택을 받고 난 뒤, 다음 해부터 향후 몇 년간 보험료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보험회사는 자선 업체가 아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니 당연한 일이다.

공사를 무사히 끝낸 것은 다행이지만 올라간 보험료를 낼 때마다 한 동안 속이 쓰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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