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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Dec 10. 2020

너를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어!

  이별이 다행스러웠던 아이를 다시 만났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라는 표현이 있다.

십 년을 네 번 넘게 살다 보니 그 말이 계속되는 인생의 새로운 만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어디서든 누군가를 다시 만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함도 알게 되었다.




밀려서 전근 온 12번 방에 처음 출근한 날, 소삐라는 이름의 아이가 결석을 했다.


다음 날, 아이들을 맞이하느라 다른 특수학급 보조 교사들과 학교 현관 앞에 서 있는데 한 보조교사가 들어서는 차를 향해 "소삐"라고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는 아이와 돕는 엄마를 보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소삐, 네가 그 소삐?'

나도 모르게 "소삐? 소삐!"를 외쳤는데 그 엄마가 나를 보더니 "Ms.P!" 하며 반색을 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과 함께 교실로 향하면서 나는 소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제 결석한 아이 이름표를 보고 아주 잠깐 '재작년 전임 학교의 3번 방에 있던 소삐랑 같은 이름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단순히 같은 이름이 아닌 바로 그 소삐였다.

더 커지고 더 무거워졌지만 바로 그 쏘삐.


1년 만에 만난 소삐는 여전히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1년 내내 기저귀를 가느라 애를 먹고 변기에 안 앉았겠다고 떼쓰는 무거운 애를 변기에 앉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소삐는 다운증후군 아이들의 특성 중 하나인 질긴 고집과 버티기에 무서운 식탐까지 가진 다섯 살 꼬마 공주였다.

소삐의 엄마는 늦둥이 소삐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배변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못해서 내가 소삐를 만났을 때는 엄마가 기저귀 떼기를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였다.

아마도 부모가 오냐오냐 받아주기만 하고 훈육을 하지 않으니 고집은 더 세지고 먹는 것에 대한 집착도 심해지는 것 같았다.

배변 훈련은 학교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집에서 적극적으로 훈련을 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여러 번 부탁을 했지만, 기저귀 값이 많이 든다고 징징대 소삐 엄마는 소변으로 가득 찬 기저귀를 갈아주지도 않은 채 소삐를 등교시키곤 했다.


지난 2년, 특수학급 유치반에서 일하면서 기저귀 차는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몹시 지쳐있었다.

갑작스러운 전근에 당황스러웠지만, 이 전근은 나를 기저귀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12번 방에는 소삐를 빼고는 기저귀 차는 아이가 없고 너무도 다행스럽게 이번에는 소삐에게 1:1 보조 교사가 있어서 소삐의 기저귀는 더 이상 내 몫이 아니었다.

그 보조교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더 이상 기저귀 실랑이를 안 해도 되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며칠 뒤, 소삐의 1:1 보조 교사가 몸이 안 좋아서 출근을 못 한 것이다.

10월인데도 무척 더운 날이었고 다섯 번이나 소삐를 화장실에 데려가서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게다가 똥기저귀는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집에 가기 직전, 소삐는 기저귀에 푸짐하게 대변을 보았다.

아뿔싸! '이제 기저귀는 안녕'이라고 룰루랄라 한 것이 잘못이다.

마스크를 썼음에도 스며들어오는 냄새를 참으며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일 년 사이 더 커진 소삐의 엉덩이를 닦으면서 경솔하게 희희낙락했던 것을 반성했다.

기저귀로부터 해방이라고 생각한 지 한 달만에 다시 기저귀와 씨름한 날이었다.

다행히 그 후로는 소삐의 1:1 담당 보조 교사가 열심히 출근해 주어서 기저귀로 실랑이를 할 일은 아직까지는 다시없었다.


1년 만에 다신 만났건만 여전히 기저귀를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는 소삐와 담당 보조교사의 피로한 얼굴을 볼 때면 그 수고스러움이 안타깝고 무책임한 소삐의 부모에게 화가 난다.

1년 전 여름방학을 맞던 때, 3번 방 교사들은 소삐 엄마에게 방학 동안 제발 배변 훈련과 기저귀 떼기를 해달라고 부탁에 부탁을 했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었는데 소삐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는 소식에, 부끄러운 미음을 솔직고백하자면, 약간 서운했지만 몹시 홀가분했다.

무거운 기저귀 갈아주기로부터 해방된 것과 저귀에  큰 일의 뒤처리로 힘겨웠던 시간이 끝난 것에 안도감까지 느꼈다.

그래도 설마 기저귀는 뗐겠지 생각하고는 소삐를 잊고 지냈는데 사람의 인연은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소삐와 다시 한 교실에서 만났고, 아직까지는 한 번이지만 내 바람과 상관없이 소삐의 똥기저귀도 갈아줘야 했다.





그런데 시간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떼만 쓰던 먹보 다섯 살이 조금은 어눌하지만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친구들과도 어울릴 줄 아는 일곱 살이 되어 있었다.

시간의 힘이 아니라 교육의 힘인가?

그래, 교육의 힘이라고 믿고 싶다.

남다르게 특별한 아이들도 다른 보통의 아이들처럼 학교에서, 교육의 테두리 안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여전히 기저귀를 화장실 삼고 있지만 두세 번에 한 번은 스스로 변기에 앉기도 하고 기저귀를 갈아주면 혼자 옷도 올려 입을 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먹는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토가 나올 정도로 음식을 입에 몰아넣을 때도 있지만,  음식을 먹은 뒤 주변을 정리하는 흉내도 내는 아이가 되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면 도망 다녀서 교실로 들어가는 것에 애를 먹이던 아이가 친구들과 줄을 서서 선생님을 따라 교실에 가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하려던 아이가 수업시간에 ABC를 그리고 손뼉 치는 교사들 앞에서 해맑게 웃기도 한다.


소삐를 보며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장애로 인해 속도가 더디거나 배움의 능력이 다소 부족한 아이들도 학교와 교실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며 날마다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을 경험한다.

12번 방에서 다시 만난 소삐의 성장을 보며 언젠가 기저귀에 배변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깨달은 소삐가 스스로 기저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날을 꿈 꿔본다.




뒷 이야기

소삐의 이야기를 쓴 것은 몇 주 전이다.

그런데 글을 발행할 생각이었던 오늘, 소삐의 푸짐한 변을 다시 한번 마주해야 했다.

소삐의 1:1 보조교사의 휴식 시간과 아이들 화장실 가는 시간이 겹쳐서 할 수 없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소삐를 데리고 화장실에 갔다.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보라니 훌떡 기저귀를 내리는 소삐를 본 순간 나는 말을 잃었다.

장갑을 두 겹으로 끼고 열심히 엉덩이를 닦아내고 나니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나중에 교실로 돌아온 소삐 담당  교사가 이야기를 듣고 미안해하는데 진심으로 괜찮다고 했다.

이틀에 한 번은 소삐의 똥기저귀를 담당하는 그 교사의 어려움을 알기에 내 덕분에 한 번이라 그 짐을 덜었다면 진심으로 괜찮았다.

하지만 깨끗한 기저귀를 차고 까불거리는 소삐와 하교시간에 만난 소삐 엄마의 얼굴은 아주 얄밉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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