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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Jan 22. 2021

나의 최선과 엄마의 최선, 그 먼 거리

참 시시한 동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말에 끌려다니며 사는 것에 지쳤던 내가 지금은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던지는 엄마가 되었다. 




최선 


엄마에게는 

한 문제도 틀리지 않는  

 

만점

올백

일등 

 

나에게는

한 개 또는 두 개

가끔 세 개도 틀리지만 

내가 매일 하고 있는 것

 

열 개를 틀리던 날도 

계속하고 있었던 것


그렇지만 엄마 마음에 닿지 않는 것 

 

내일도 모레도

엄마의 마음에 결코 닿을 수 없는 것   

     



*시시한 시의 뒷 이야기*


나는 만점이나 올백을 맞아본 적도, 일등을 해 본 적도 없다. 그럴만한 실력이나 역량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꾀를 부리지 않는 성실한 학생이었으므로 내가 하는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며 살았다. 그럼에도 1등을 한 친구나 한 문제도 틀리지 않는 반 아이를 보면 내가 한 최선은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노력했음에도 부족하기만 한 결과에 나의 최선이라는 것에 대한 자괴감을 갖곤 했다.


엄마로 살던 어느 날, 아이들에게 최선을 강요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깨달았다. 만점이나 올백 그리고 일등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것이 인생을 좌우할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월을 통해 배웠음에도 아이의 성적이 A가 아닌 것에 마음이 언짢았다. 성적표의 A가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열심히 해서 받아온 B나 C에 대해 아이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치부하고 있었다. 더 노력하면  A를 받을 수 있고 최선을 다하면 A+도 만들 수 있다고, A+를 받는 최선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이의 최선이 최고가 아이라는 이유로 노력을 점수로 평가하는 엄마가 되어있었다.


그 밤에 시를 쓰며 다시금 알았다. 세상이 요구하는 최선은 최고가 되는 것임을. 격려를 가장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토닥거림이 내가 하고 있는 최선을 인정하지 않으며 최고를 강요하는 것임을. 그런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지만 닿지 못했던 것들에 늘 나의 노력이 부족했으므로 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왔음을. 그렇게 살아와놓고 나 역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보라고 격려를 가장한 최고를 요구하고 있음을 말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알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최선이 바라는 성과에 닿지 못했을 때 땀에 젖은 최선과 쓰디쓴 노력은 하찮아진다. 과정이 중요하다면서 과정의 애씀을 우리가 한 최선의 성과로 받아주지 않는다. 세상이 기대하는 최고에 미치지 못하므로 우리의 최선은 대부분 인정받지 못한다. 


내 노력이 만든 것이 최고가 아닐지라도 오늘도 살아낸 내 하루가 최선이었음을, 어떤 점수를 앞에 두었든 내 아이가 받아온 점수가 최선이었음을 인정하고 잘했다고, 그만하면 잘했다고 토닥여주며 살고 싶다. 너의 수고와 애씀이 충분한 최선이었다고 따뜻하게 받아주는 넉넉한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작은 최선에도 박수를 쳐주는 여유로운 인생이 되어보고 싶다.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images/id-1476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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