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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31. 2018

올해 여름, 서울로 떠난 '호사'스러운 바캉스  

쉰내 날만큼 식상한 말이지만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유별나게 더운 올해 여름, 거의 모든 의욕을 잃었다. 무더위에 녹다운되어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집과 도서관만 오갔다. 피서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서관도 싫증 날 무렵,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는 여행욕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번잡스러운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내가 한여름 성수기에 갈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멀리 가봐야 지치고, 힘들고, 돈까지 많이 깨지니 먼 여행은 찬바람이 불 때쯤으로 미뤘다. 대신 들끓어 오르는 여행욕구를 잠시 재울 수 있는 곳을 서울 안팎에서 찾기로 했다.

  

※ 이 코스는 필자가 프리랜서이기에 가능했던 평일 기준으로 작성됨



여의도 한강 유람선

그 화제의 간장게장을 먹은 날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였기 때문에 간장게장만 먹고 오긴 아쉬워 <한강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어릴 때, 서울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경기도로 이사했다. 그 이후에 주 생활 반경이 경기도에 머무른 부모님은 특별한 일이나 행사를 제외하고 굳이 서울에 나가시진 않았다. 혹시나 싶어, 엄마 아빠께 물었다. 유람선을 타 보셨느냐는 나의 질문에 엄마 아빠는 티브이에서만 봤다는 슬픈 답변을 듣자마자 곧장 예매를 했다.    


자고로 가까이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르는 존재가 인간이다. 서울 살 때는 먹고살기 바빠서 가지 못했던 서울의 명소를 엄마, 아빠는 초로의 한가운데에 가게 된 것이다. 간장게장을 기분 좋게 클리어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여의도로 넘어왔다. 아직 유람선의 탑승권 발권 시간까지는 좀 여유가 있어서 유유자적 한강을 산책했다.     


빌딩 숲이 들어서기 전 마포와 여의도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는 부모님은 잠시 그때를 생각하며 추억여행을 떠나셨다. 88 올림픽 때 63 빌딩이 있었나, 없었나로 투닥거리기 시작하셨다. 내가 인터넷 검색으로 85년 완공으로 결론을 지으니 63 빌딩 대첩은 마무리되고 평화를 찾았다. 미세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하늘은 서서히 노을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평소 보던 하늘이었음에도 한강이란 특급 필터가 더해지니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졌다. 머리엔 서릿발이 내려앉았지만 마음만큼은 뜨겁게 데이트하던 20대 시절로 돌아간 부모님은 신이 나서 연신 카메라에 서로의 모습을 담았다. 물론 배경은 노을이 물든 한강이다.     


마치 먼 타국에서 온 여행객처럼,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 사이에 끼어 유람선에 올랐다. 선배 여행자들이 알려준 대로, 미리 줄을 서서 유람선에 입성하자마자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가 명당을 선점했다. 의자에 셋이 나란히 앉아 한강 야경을 즐겼다. 단 40분의 짧은 코스지만 유유자적 강바람을 가르며 유람선은 한강을 달렸다. 그 배에 탄 모든 이들을 잠시나마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도시의 반딧불이 프로 야근러들이 만들어내는 서울의 야경은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전날까지만 해도 나 역시 빌딩 안  프로 야근러 중 하나였지만 오늘만큼은 고민 없이, 걱정 없이 즐기기로 한다. 그것이 여행자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한국말보다 외국어가 많이 들리는 한강 유람선. 멀리 나가지 않아도, 큰돈 들이지 않아도 잠시나마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 온 착각을 하게 만들어준 도심 속 바캉스 명소로 손색없었다.         


은평 한옥마을

경기도민과 은평구민이 만나기로 한 접선 장소는 구파발역의 “롯데몰“이었다. 원래는 더위를 피해 진관사 계곡을 갈 계획이었다. 전날은 물론, 당일 오전까지도 비가 오락가락한 날씨 탓에 몰링(Malling)을 하기로 일정을 급변경했다. 하지만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니 마침 비도 잦아들고 해도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이때다 싶어 계곡은 패스하고 <진관사>로 향했다.     


몇 해 전, 일 때문에 그곳에 계신 스님을 뵐 일이 있어 <진관사>에 간 적이 있다. 처음 갔을 때, (물론 외곽이긴 하지만) 서울에 이렇게 큰 절이 있나 싶어 놀랐다. 1700년이 넘은 절답게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로 중간중간 신식 시설들이 한창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공사 소음 때문에 시끌시끌한 절 안의 작은 찻집에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일을 마무리하고 진관사를 빠져나올 때쯤에는 다음에 조용할 때 한 번 더 와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게 벌써 5년 전이니 그 사이 진관사는 한층 정돈되고 세련되어져 있었다.     


비가 갠 평일 늦은 오후에는 방문객이 많지 않았다. 진관사 내부의 찻집에 자리를 잡았다. 작게 난 창 밖에는 산 중을 지나는 비구름이 후드득 빗방울을 흩날리고 있었다. 도심의 소음도, 에어컨 바람도 없는 한적한 산사에서 오랜만에 시원한 미숫가루를 마시며 호사를 누렸다. 들뜬 웃음소리는 사치처럼 느껴지는 공간에서 조용히 여백 많은 대화를 나눴다.     


수다도 잠잠해질 무렵 해가 오늘의 임무를 다하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산속이기 때문에 그의 퇴근은 좀 더 빨랐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너털 너털 다시 속세로 향할 때다. 두런두런 수다를 떨며 산을 빠져나오니 거대한 한옥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은평 한옥마을>.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그곳이 여기에 있는 줄은 그제야 알았다. 2012년에 착공해 어느덧 거의 입주가 끝난 듯, 잘 정돈된 신식 한옥들로 가득했다. 뒤로 북한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한옥마을은 그 자체로 그림이었다.     


우리는 재빨리 명당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한옥 마을 입구에 위치한 큰 편의점의 야외 테라스가 바로 그곳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은 탓에 식사를 하긴 무리였고, 이미 진관사에서 차를 마셨기 때문에 간단하게 캔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온도 차 때문에 겉면에 물방울이 맺힌 캔맥주의 입구 부분을 쓰윽 티셔츠 끝으로 닦았다. 톡 하고 캔을 따니 하얀 거품을 뿜어낸다. 흘러내릴까 재빨리 입을 대고 입 안 가득 맥주를 마셨다. 입 안으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맥주가 퍼졌고, 눈앞에는 북한산을 등에 업은 한옥 마을이 펼쳐졌다. 그때 영자 언니의 그 말이 떠올랐다.     


      인생 뭐 있냐?     


큰 성공, 큰 행복을 찾아 헤매며 청춘의 날들을 낭비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더 멀리 있는 것이 내게 더 큰 행복을 줄거라 믿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 진리를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에 감사한다. 1000원이 조금 넘는 버스비, 3000원이 넘지 않는 맥주 한 캔이면 당분간의 행복을 충전할 수 있다.      



 

을지로 스몰 하우스 빅 도어

평소 심심할 때 비행기 티켓 가격을 검색하는 버릇이 있다. 당장 떠나지는 못하지만, 언제 어느 때 짬이 날지 모르는 때를 준비하는 프리랜서 인생의 웃픈 습관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습관은 호텔까지 검색하는 버릇으로 확장되었다.


아마 외노자로 중국에서 일할 때, 호텔을 집 삼아 살았던 날들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 이후로 확실히 혼자 호텔에 묵는 두려움은 사라졌다. 물론 항공권을 검색하면 연이어 숙박까지 연결해주는 친절한(?) 인공지능도 분명 한 몫했다. 그러다가 당일 특가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마음에 두었던 호텔의 핫딜이 떴을 때, 훌쩍 혼자 호캉스(호텔+바캉스)를 떠나곤 한다. 평소 가격의 1/3 정도로 가격이 떨어졌을 때가 바로 내 기준의 적기다.     


이번에 나의 타깃이 된 곳은 서울 한복판 명동에 위치한 작은 디자인 호텔이다. 반 백 살이 넘은 오래된 건물을 리노베이션 한 호텔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인테리어로 알음알음 손님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완벽한 위치, 세련된 디자인, 합리적인 가격으로 관광객에게도, 출장객에게도, 연인들에게도, 나 같은 홀로 여행객들에게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나의 이번 호캉스 목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그러다 지치면 책이나 읽는 한량 of 한량의 바캉스다. 호텔로 향하기 전, 도서관에 들러 읽을만한 책을 몇 권 빌렸다. 굳이 두껍고 심각한 책은 택하지 않았다. 술술 읽히는 가벼운 에세이 두 권, 평소 가고 싶었던 여행지의 흔적을 담은 여행 에세이 두 권, 총 네 권이다. 가방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오후 3시 호텔 체크인이 땡 하자마자 호텔에 입성했다.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호텔 특유의 희고 까슬까슬한 침구 위에 대자로 뻗었다. 한참을 뒹굴거리며 책을 읽었다. 호텔 1층 비스트로에서 투숙객에게 무료로 무제한 제공되는 커피와 근처 백화점에서 산 빵을 먹을 먹으며 책을 한 권 한 권 클리어해갔다. 아직 투숙객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은 평일 늦은 오후의 호텔은 조용했다. 덕분에 언제 잠든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7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좀 출출해져 밖으로 저녁거리를 사러 나갔다. 오늘의 타깃은 떡튀순이다. 평소라면 애써 자제하는 빵과 떡튀순이라니... 탄수화물 민족의 후손다운 선택이자 반항기 다분한 먹부림성 일탈이다.     


떡볶이를 포장해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 양동이로 퍼붓듯 비가 쏟아졌다. 고작 10분을 걸어왔을 뿐인데 호텔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방으로 들어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린 후 만찬을 시작했다. 떡볶이, 튀김, 순대 그리고 맥주가 차려진 소박하지만 탄수화물 대잔치 메뉴를 보니 내적 댄스 욕구가 꿈틀거린다. 작게 난 창 밖으로 여전히 세차게 빗방울이 부딪혔다. 조도를 최대한 낮추고, 음악도 들릴 듯 말 듯 작게 깔았다. ‘서울’이라는 한없이 뜨겁고도 차가운 도시 한가운데 외로운 섬처럼 자발적 고립을 택한 나님을 칭찬했다.     


멀지 않은 곳에 멀쩡한 집 놔두고 무슨 허튼짓이냐 욕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동 자체로 피곤함을 느끼거나, 너무 낯선 곳에 갔을 때의 에너지 소비가 부담스러울 때, 나에게는 그 어떤 여행보다 만족도 높은 선택이었다. 1박 2일간의 짧은 호사가 있었기에 나는 다시 순한 일개미 모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멀리 떠난다고, 값비싼 것이라고 꼭 좋은 여행은 아니다. 그저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쉰내 날만큼 식상한 말이지만 ‘행복‘은 생각보다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내 기대치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달라진다. 멀리서 찾지 말자.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자. 그럼 그곳에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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