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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Oct 15. 2018

일일 드라마 속 부잣집 사모님처럼 해주세요

엄마와 미용실에 갔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들어가면 머리카락에 힘이 없어진다. 그 푹 주저앉는 머리카락을 참지 못하고 난 뿌리 볼륨펌이라는 것을 시도했다. 다행스럽게도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내 헤어스타일의 진화를 옆에서 지켜본 엄마도 내심 그게 하고 싶으셨나 보다. 다음에 미용실은 너 가는 데 가야겠다고 하셨던 말을 가슴속에 담아 두었다. 그리곤 엄마가 파마를 하셔야 한다는 얘길 듣고 '그 미용실'로 모시고 갔다.

     

평소 엄마는 여느 엄마들이 그런 것처럼 동네의 작은 미용실에서 최대한 오래 유지되고 그리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줌마 전용 뽀글 파마를 하곤 하셨다. 스타일보다도 가격, 머리카락의 건강보다 유지력, 디자이너의 실력보다는 동네에서의 친분이 엄마의 미용실을 선택하는 기준이었다.

     

사실 내가 다니는 미용실은 홍대, 강남처럼 트렌디하고 고급진 곳은 아니다. 내가 사는 경기도 변두리 지역 번화가에 위치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미용실이다. 가운을 입혀주는 것, 갓 내린 커피를 가져다주는 것도 어색한 엄마는 의자에 앉아 긴장한 채 두리번거렸다. 그때 나는 담당자분께 말했다.


일일 드라마 속 부잣집 사모님처럼 해주세요
정수리 뿌리 볼륨 최대한 넣어주세요

     

엄마는 전문가의 손에 머리를 맡기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셨다. 혹시나 브로콜리 할망구 무시하나 싶어서 나는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감시 아닌 감시를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엄마는 드라마 속 부잣집 사모님만큼은 아니어도 한층 고급진 헤어스타일로 변신하게 되었다. 엄마는 연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신기해 차근차근 아직은 어색한 머리 스타일을 살폈다. 내가 위치를 알려드려도 엄마 혼자서는 결코 혼자 미용실 문을 열지 않았을 테고, 또 도전하지 않았을 새로운 스타일이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만족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 가슴 한쪽이 울컥해졌다.

 

엄마는 일찍 외할아버지를 여의고 이모와 친척집을 전전하며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할머니의 재혼으로 성도 몇 번 바뀌었던 고단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결혼을 한 후에는 큰 사고를 친 건 아니지만 생활력과는 담쌓은 아빠와 네 남매를 낳아 키우느라 안 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본인을 가꾸는 일, 꾸미는 일, 당신 몸치장하는데 돈을 쓰는 일은 사치라고 생각하며 살아오셨다.

     

평생 소처럼 일만 하던 엄마가 바뀐 건 몇 해 되지 않아다. 몸 아끼지 않고 일하니 환갑도 안됐는데 연골은 다 닳아 없어졌고 어깨의 힘줄이 끊어졌다. 입원과 수술, 재활치료를 하면서 몸도 마음도 약해진 엄마가 안쓰러웠다. 변명이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힘들고 내가 바빠 엄마가 그런 상황인 줄도 몰랐다. 그전까지 엄마가 아프다고 하면 “아픈걸 나한테 말하면 낫나? 이 시간에 병원에 가, 내가 의사도 아닌데 엄마 아픈데 고쳐 줄 수가 없잖아 “라고 차갑게 말하는 딸년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그렇게 아프시고 나니 서늘한 생각이 번뜩 들었다. 엄마는 한해 한해 약해지시고 있다. 그러다 보면 엄마와 함께 할 날이 어쩌면 얼마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어른이 되고 난 후 ‘영원‘이란 말은 책 속에나 있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와 나의 시간도 영원할 순 없는 것이다.


    


엄마의 젊음을 갉아먹고 자란 자식은 엄마의 젊음을 되돌려 드릴 순 없다. 하지만 엄마가 두고두고 즐거워할 추억거리를 만들어 드릴 수는 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함께 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것이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된다. 함께 여행을 가면 시간도 함께 보내고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많이 나누게 된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고 엄마와 같은 지붕 아래 평생 살았지만 신기하게도 집에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 집 밖에서는 술술 나왔다.

     

백화점에 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소화시킬 겸 아이쇼핑을 한 후 커피로 마무리하는 게 우리의 가장 흔한 코스다. 누군가에게는 식상한 코스지만 시장이 익숙한 엄마한테는 나름의 기분전환 코스가 된다. 내가 점심을 사면 엄마는 커피를 산다. 나만 너무 사면 엄마가 미안해하니까 커피는 엄마한테 사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뭔 커피를 밖에서 비싼 돈 주고 사 먹냐 “며 집에 가서 먹 자시던 엄마도 소소한 바깥 외출의 즐거움을 깨닫고 누리고 계신다.

  

그렇게 때가 되면 가까운 곳에 나들이를 간다. 봄 벚꽃이 피면 벚꽃을 보러 창덕궁, 중랑천에 가고 가을 단풍이 지면 덕수궁에 간다. 엄마가 보기 좋을만한 영화가 나오면 엄마 소매를 끌어 극장으로 향한다. 김밥천국에서 산 김밥을 들고 동네 공원에 가서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즐기기도 한다. 명절, 제사, 김장이 끝나고 나면 뻐근해진 어깨를 풀기 위해 찜질방에 가거나 동네 편의점 앞 파라솔에서 나란히 앉아 맥주 한잔씩 홀짝이고 돌아와 곯아떨어진다. 새로운 음식점이 생기면 나란히 손잡고 탐사에 나선다. 나물, 된장이 좋다고 말하던 엄마는 이제 리코타 치즈 샐러드도 잘 드시고, 퀘사디아, 분짜도 좋아하신다. 엄마에게 [ 바깥 음식 = 느끼하다 ]라는 뼈에 박힌 공식은 이제 좀 깨졌다.  

     

일 년에 한두 번은 여행을 한다. 기차, 버스를 타기도 하고 종종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도 한다. 친목회에서 가는 단체 패키지만 다녔던 엄마에게 자유 여행은 또 다른 세계였다. 환갑이 훌쩍 넘은 엄마에게서 풀꽃 하나, 햇살 하나에도 까르르 웃음이 나는 소녀모드를 작동시키는 스위치가 여행이다. 젊은 시절엔 먹고살기 바빠서, 나이 들어서는 그렇게 누리고 살아 보질 않아서 몰랐던 소소한 즐거움들을 더 늦기 전에 느끼게 해드리고 싶다.

 

막장 스토리만 빼고 일일 드라마 속 사모님처럼 살게 해드리고 싶지만 현실은 제자리다. 여전히 엄마의 일상은 격동의 시대 억척스러운 아줌마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종종 이렇게 막내딸 찬스로 코에 바람도 넣고 한 땀 한 땀 즐거운 추억과 기억을 쌓아 간다면 언젠가 엄마를 보내야 하는 날, 덜 미안할 것 같다.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해 혹은 누구에게 칭찬받기 위해, 또 무엇을 바라고 하는 행동은 아니다. 그저 언젠가 오게 될 엄마와 헤어지는 날, 하지 못한 것들이 쌓인 후회의 눈물은 흘리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뒤늦은 후회의 눈물 대신 그동안 고마웠다고 감사의 인사를 하고 엄마와 웃으며 헤어지고 싶다. 좋아하는 노래 속 가사처럼 내 곁 있는 ‘변함없이 소중한 것들’을 가슴에 껴안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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