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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08. 2019

어서와 마흔은 처음이지?

이런 모습일 줄 알았다면 더 막살걸!

 

때는 지난 2월 말이었다. 새해가 시작된 지 한참 시간이 흘렀고, 설날도 지났기에 누가 뭐래도 완연한 2019년이었다. 오랜만에 익숙한 얼굴들을 만나는 자리에 참석했다. 지난해에 하지 못한 송년회이자 늦은 신년회를 겸한 자리였다. 늘 그래 왔듯 1차는 맛있는 저녁을 먹고 2차는 연희동 골목의 스몰비어 집에서 본격적인 수다판을 벌였다. 우리가 사랑하는 조합인 바싹 구운 먹태와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맥주 한잔을 앞에 두고, 각자가 살아가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맥주잔이 쌓여 갈수록 벌겋게 얼굴이 점점 달아 오른 A가 말했다.      



내 마흔이 이런 모습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마흔 언저리의 사람 넷이 모여 나눈 이야기에 흔하게 오르내리는 주제이기에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다. 다만 저 멘트를 내뱉고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A의 모습에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모두는 조용해졌다. 마흔 고개를 막 넘은 B와 C, 이제 막 마흔이 된 A, 그리고 마흔을 코앞에 둔 나까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마흔 언저리의 넷 모두가 늘 고민하고 생각해왔던 말을 A의 입을 통해 듣게 되었다.     


지난 설날 연휴 친척들의 공격을 무사히 피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의기양양하게 어깨 쫙 펴고 만난 모임에서 폐부를 깊숙이 찔렸다. 이 모임뿐만 아니다. 친구들, 후배들, 선배들과 만나 소소한 얘기를 나누는 자리에선 으레 빠지지 않고 저 말이 나왔다. 결혼 유무도, 커리어 성취 여부도, 돈이나 성격 문제도 아니었다. 그저 모두들 자신의 노력에 반하는 인생의 결과가 몹시도 불만이었다.    


나의 스물이

나의 서른이

나의 마흔이

나의 쉰이 이런 모습일 줄 알았다면 더 막살걸!

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면서 살 걸!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다. 돌이켜 보면 늘 그랬다. 미래를 위해 지금의 즐거움은 잠시 미뤄두고 안주하지 말고 조금 더 나를 채찍질하라고 배워왔다. 그러면 미래의 나는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렇게 환상에 사로잡혀 지난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스무 살의 현실은 10대 학창 시절, TV를 보며 꿈꿨던 상상과 달랐다. 캠퍼스의 로망 따윈 TV나 영화 속에서나 가능했다. 외롭고 괴로웠던 20대를 견딜 때 유일한 희망은 서른이 넘으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좀 더 안정될 것 같다는 희망이었다. 서른이 되고 보니, 허황된 캠퍼스의 낭만만큼이나 30대의 안정과 성숙은 나와는 먼 일이었다. 아이가 만든 모래성처럼 파도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손에 쥐어지는 건 없고 속절없이 노화가 진행될 뿐이었다.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 경험과 연륜이 훈장처럼 쌓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얻은 건 그저 [ 합리적인 단념과 신속한 포기 ] 였다.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오롯이 내 힘으로 서울 하늘 아래 내 이름 박힌 집하나 갖는 건 불가능한 시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원래 내 몫이 아닌 것을 가지 못했다고 미련을 두고 전전긍긍하기보다는 빠른 인정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미혼 프리랜서들이라면 흔히 겪는 집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출이라는 ‘통곡의 벽‘ 앞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했다는 지인들의 경험담은 자연스레 나를 포기라는 급행열차에 태웠다. 드라마틱한 인생역전은 말 그대로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걸 우린 모두가 알고 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주름살, 기미와 함께 느는 것은 바로 ‘합리적인 포기’다. 과거에 나라는 인간은 [ 포기 = 인생의 실패 ]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끈기, 인내, 노력이 없는 인생은 실패자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능력 밖의 일들을 해내느라 아등바등,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이상은 높고 현실은 저 바닥에 있었다. 잘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나도 잘 난 사람이 되는 줄 제대로 착각했다. 그들이 자극제가 되어 나를 담금질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날고 기는 사람들 사이 사회생활 십 수년을 보내고 보니 난 열등감, 자괴감, 패배감에 쩔어 있는 못난이일 뿐이었다. 나한테 제일 무례한 사람은 나였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누구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30대 중반 큰 고비를 넘긴 후 내가 애써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하나 둘 내려놓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면 보상받을 거라는 믿음, 참고 견디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환상, 무엇보다 무엇인가를 이뤄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애썼던 날들이 덧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나의 선택을 '정신 승리'라 코웃음 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내게 남은 날들을 누군가를 향한 원망과 불평으로 낭비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신승리'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내 마흔이 이런 모습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A의 말에 격하게 수긍한다. 그러나 말은 같지만 결은 다르다. 미래에 대한 불안,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무겁던 서른의 나 보다 마흔의 나는 분명 더 가벼울 것이기 때문이다. 마흔이 된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이 천지개벽할 일은 없다는 걸 충분히 아는 나이다. 그래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뾰족하게 세우던 예민했던 나는 이제 거북이처럼 단단해진 몸과 마음으로 느릿느릿 인생을 걸어가고  있다. 마흔 고개를 넘어 쉰, 그리고 더 먼 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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