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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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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Oct 25. 2019

세상에 싸고 좋은 건 없어

대가도 없이 크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당신은 도둑님


 


몇 해 전, 일본 시즈오카를 여행할 때였다. 프리랜서의 특권인 비수기, 평일 여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5박 6일간 (성수기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했다. 문제는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날이었다. 주말이었던 그날은 시즈오카 시내에서는 내가 가진 예산으로는 예약할 수 있는 방이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보니 일본 유명 아이돌 그룹의 공연 날이 겹치는 바람에 생긴 문제였다. 시내에서 방을 찾다 포기하고 결국, 공항에서 멀지 않은 작은 시골마을(?) 후지에다의 신축 비즈니스호텔을 예약했다. 마지막 날이니까 잠만 자면 되는데 저녁에 라멘도 야식으로 주고, 조식까지 주는데 고작 6000엔. 숙소 1박 예산에서 한참 내려간 금액이었다. 아낀 돈으로 쇼핑을 좀 더 할 수 있다는 얕은 계산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외국인들의 후기는 없었지만 신축이니 어느 정도 기본은 하겠다 싶어 냉큼 예약을 했다.  

  
시즈오카 여행의 마지막 밤, 유일하게 나를 허락해 준 그곳을 가기 위해 시내에서 외곽으로 향하는 전철에 올랐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후지에다 역에 내렸다. 생각보다 역은 컸다. 하지만 역을 나와 호텔까지 걷는 10분 중 초반 2~3분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가게나 사람들도 별로 없는 어둠이 계속됐다. 천성이 쫄보인 나는 비+어둠+혼자의 3단 콤보가 만들어 내는 상상 속 이미지를 지우느라 연신 머리를 흔들어야 했다. 스릴러 영화 속 희생양들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도착했다는 묘한 긴장과 개복치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내는 무형의 공포가 쌓여 가는 사이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나를 맞아 준 건 따뜻한 온기도 아니었고, 친절한 호텔 직원도 아니었다. 로비 가득 한껏 멋을 부린 중고교 체조 선수들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이었다.


아마 이 시기에 시즈오카에 아이돌의 공연 말고 또 전국 체조 대회가 있었나 보다.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오지 않도록 야무지게 묶은 호리호리한 학생들이 방을 배정받기 위해 수다를 떨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눈치 빠른 상위 직급의 직원은 놀란 외국인의 등장을 감지하자마자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어차피 단체야 단체고, 나 같은 개인 손님을 후딱 처리해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나를 맞아 준 건 손바닥만 한 침대와 옆 건물로 가로막힌 손바닥만 한 창문, 그리고 신축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90년대 분위기의 인테리어였다. 옆방에서 튼 티브이 소리가 벽을 넘어왔고, 작은 냉장고는 천식 앓는 할아버지처럼 덜덜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방을 가득 채운 텁텁한 공기는 내 기분까지 텁텁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룻밤이니까 참지 여기서 며칠을 보내야 했다면 난 주저 없이 호텔을 옮겼을 수준이다. 어깨에 멨던 백팩을 침대 위에 내던지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 6000엔짜리가 그렇지 뭐.
역시 세상에 싸고 좋은 건 없어


난 고작 한국돈 약 6만 4천 원 정도를 지불하고 얼마나 좋은 호텔을 예상했던 걸까? 우리나라에서도 겨우 모텔을 갈 정도의 돈 가지고 얼마나 대단한 호텔에서 잘 거라 기대했던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니 스스로가 부끄럽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피식하고 터져 나왔다.


대다수의 경우 값을 더 지불하면 그에 준하는 결과를 얻게 마련이다. 5성급 호텔료를 지불하면 5성급에 걸맞은 수준의 시설과 서비스를 얻을 수 있다. 퍼스트 클래스의 비용을 지불하면 이코노미 클래스에 몸을 구겨 타는 것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안락한 여행을 할 수 있다.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도 않고, 그에 응당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 그 이상의 결과를 얻길 바란다.
  

운동도 식이조절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몸짱 연예인들의 사진을 보며 그들처럼 날씬하고 건강한 몸을 갖길 바란 적이 있다. 합격자들의 패턴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분석하지도 않고, 방구석에서 뒹굴 거리면서 ‘시켜주기만 하면 나도 잘할 자신 있는데... 왜 날 몰라주지?’라며 세상을 원망한 적이 있다. 남들의 성공은 쉬워 보였고 나는 그저 불운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고교 동창인 S는 내가 보기에 늘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랑 분명히 똑같이 놀았는데 성적은 늘 나보다 좋았고, 더 좋은 대학교에 갔다. 그녀가 마음먹은 건 다 이루는 것처럼 보였다. 졸업 후 원하는 직장에 취업했고, 좀 다니다가 사표를 내고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돌아와 몇 년 다시 직장 생활을 하다 워킹 홀리데이 나이 제한에 찰랑찰랑 닿을 즈음 다시 호주로 떠났다. 돌아와 취직을 했고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되었다. 심리적으로는 은행과 공동 소유긴 했지만 어쨌든 부부의 이름으로 된 집에서 다정한 남편, 토끼 같은 딸과 평범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 결혼 전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았고, 결혼 후에는 세상이 ‘정답’이라 말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미처 몰랐다. S의 오늘이 있기까지 어떤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S는 금수저가 아니었기에 대학에 들어간 이후, 등록금을 제외하면 스스로 벌어 생활을 했다. 어학연수도, 워킹 홀리데이도 모두 ‘이때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절실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호주 워킹 홀리데이는 점심값을 아끼고 허튼 돈을 쓰지 않고 악착같이 모아 떠난 인생 일대의 계획이었다. 영국 시절에는 버터나 쨈도 없이 식빵 한 봉지로 일주일을 버텨야 했다. 호주에서 살 때는 일하느라 손에 주부 습진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도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가 모두 병환으로 요양원에 계시기 때문에 비용과 신경을 더블로 써야 했다. 은행의 대출 이자는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결코 잊지도 않고 매달 찾아온다고 했다. 분명 힘들지만 자기가 선택하고 계획했던 일이기 때문에 감수하고 버티고 있다고 했다. 쉽지는 않겠다 막연히 생각했지만 그 정도였는지 S가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부러워했던 S의 ‘평범한 행복’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었다.


과정과 노력은 스킵하고 결과만 보게 되는 제3자는 남들의 인생이 참 쉬워 보인다. 그래서 남들의 성공을 별생각 없이 평가 절하한다. 나는 늘 바가지를 쓰는 것 같은데 남들은 제값보다 저렴하게 인생의 목적들을 얻는 줄로 안다. 도둑이 따로 있을까? 값싼 노력을 들이고 값비싼 결과를 바라는 내가 도둑이지. 운이 좋았다고 부러워만 할 게 아니라, 나는 과연 그런 성공을 바랄 만큼 노력했나? 준비했나? 투자했나?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는 시간을 가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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