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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Nov 05. 2019

샴푸 반 통이나 남아 있는데 또 주문하라고?

괜찮아 엄마. 샴푸 따위 헷갈리면 어때


며칠 전부터 엄마는 계속 온라인 마켓에서 샴푸를 주문하라고 했다. 머리가 가족 중 제일 긴 내가 쓰는 전용 샴푸는 충분히 남아 있었고, 가족이 모두 쓰는 샴푸 역시 반 통이나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몇 번을 말했는데도 무심한 딸이 샴푸를 주문하지 않자, 엄마는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곤 최종 선전 포고를 하듯 비장하게 샴푸 얘기를 꺼냈다.


샴푸 좀 주문하라니까?
샴푸 반 통이나 남아 있는데 또 주문하라고?
무슨 샴푸가 반 통이나 남아? 바닥인데?

.
.
.
.
바닥?
느낌이 쌔 했다.
조만간 바닥을 보일 건 노란색 통에 들어 있는 보디 클렌저였다.


엄마, 샴푸 하얀색 통 아니야? 그거 엄마가 사 온 거잖아?
바닥난 건 보디 클렌저인데... 


어머! 그러네.
난 여태 노란색 통에 있는데 샴푸인 줄 알고 머리를 감았네.
어쩐지 머리가 퍼석하더라. 


내일모레면 일흔 살에 가까운 어르신의 눈에 영문 글자는 깨알만큼 작았고, 별 의심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사용했을 게 눈에 보였다. 문제는 당신이 당신 손으로 직접 사 온 샴푸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깜빡깜빡의 수준을 넘어 이렇게 했던 일, 했던 말을 까맣게 잊는 일이 잦아졌다. 휴대전화를 찾는 일은 일상이고, 가끔 사용하는 기능의 스마트폰 사용법은 돌아서면 까먹으신다. 얼마 전에는 김장을 위해 시골에서 마른 고추를 주문하고 돈을 보내는 일을 잊으셨다. 또 우리 집에서 30분 거리에 사는 작은언니와 점심 약속을 잡고 약속 자체를 잊고 친구분 집에서 한참 수다를 떨고 계시기도 했다.


 엄마는 늘 말했다.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해서 공부를 잘했을지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기억력 하나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월등히 좋았다고. 서너 살 때 외할머니가 장사를 다녀오시는 길에 눈깔사탕을 사다 주던 일이며, 개울가에서 첨벙이며 맨손으로 물고기나 다슬기를 잡을 때의 상황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셨다.


하지만 정작 일주일 전, 어제,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이나 말을 지우개로 지운 듯 잊곤 하신다. 아이를 넷씩이나 낳아 기르고, 전신 마취 수술도 몇 번이고 했던 엄마다. 고상한 부잣집 사모님들과 거리가 먼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셨으니 기억 회로에 이상이 있을 법도 하다. 문제는 엄마의 나이가 나이다 보니, 단순 건망증보다는 조심스럽게 치매 걱정을 할 상황이다.


엄마는 말했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아프면 수술을 하면 되지만 낫지만 치매는 한 번 걸리면 답이 없다고. 이 단단한 신념은 우리 집에서 초기 치매 증세였던 할머니를 모실 때 생겼다. 드라마에서 보던 대로 식사를 챙겨드리고 돌아서면 다시 밥을 달라고 했던 할머니. 고모나 친척들이 오면 며느리가 밥을 안 준다고 고자질(?) 하던 할머니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으셨다. 할머니는 아무리 정신이 오락가락해도 아들 힘든 일은 시키지 않으셨고, 모든 수발은 며느리가 해주길 바라셨다. 그래서 엄마는 언젠가 자신에게도 치매라는 악마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건강검진을 할 때나, 보건소에서 별도로 치매 검사를 받았을 때 ‘이상 없음’이란 글자가 진하게 찍힌 결과지를 받고서도 안심하지 못하셨다. 치매의 폐해를 직접 겪으시면서 가족을 무너뜨리는 치매만큼은 걸리지 않길 바라며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고 계신다. TV 속 전문가들이 말하는 치매 예방 체조는 일상이고 관련 식재료, 영양제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종교가 없으니 불경 대신 구구단을 넘어 20단을 외우셨고, 노래 교실에서 배운 치매 예방 건강박수의 신봉자가 되셨다.


엄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엄마의 마음을 철렁이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막연히 상상해보곤 한다. 진짜 우리 엄마에게 치매가 온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처럼 엄마를 원망하며 엄마를 버릴 수 없는 짐짝 취급을 하게 될까? 모르겠다. 생기지 않은 일에 대해 고민과 걱정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으니 딱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지금의 내가 할 일은 엄마와 좋은 기억을 만드는 것뿐이다. 만약 엄마에게 치매가 온다면 미래의 내가 그때 고민하고 걱정하면 된다.


‘샴푸 사건(?)‘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아 연신, ’ 내가 치매가 오려나보다‘라고 말하는 엄마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 엄마. 샴푸 따위 헷갈리면 어때.

딸 얼굴이랑 이름 안 잊어버리면 되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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