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도망칠 구석은 어디인가요?
내 특기는 '도망치기'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처음 보는 사람과 어울리는 일도, 먹어 보지 않은 음식을 먹는 일도, 낯선 곳에 가는 것도 무섭고 두려워서 늘 도망치기 바빴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러저러한 핑계를 만들어 적당히 피하고 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서는 예전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물컹한 식감 때문에 썩 당기지 않는 회도, 초장으로 코팅해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꿀꺽 삼켜야 했다. 부담스럽게 선을 넘는 사람과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비위를 맞춰야 했다. 이렇게 성인이 된 후에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사회생활을 위해 크고 두꺼운 가면을 꾸역꾸역 썼다. 까다롭고 폐쇄적이며 내향적인 내가 사회가 원하는 유쾌하고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사람인 척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꾸역꾸역 썼던 크고 무거운 가면을 벗고 나면 방전되기 일쑤였다. 에너지가 없으니 정작 내가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은 물론 나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고, 소홀하게 여겼다. 진이 다 빠진 상태로 내가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엉망 그 자체였다. 헝클어지고 망가진 하루하루가 쌓여 후회 가득한 인생만 남았다. 번아웃이 찾아온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겐 아직 살아갈 날이 더 많았다. 이대로 내 인생이 망가지도록 방치할 수가 없었다.
그때 생각난 게 ‘도망칠 구석’이다. 학창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도망칠 구석이 필요했다. 물론 무조건 도망치는 건 능사가 아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도망친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만 있을 수도 없다. 나는 어차피 다시 내가 서있던 그곳으로 돌아와야 했고, 돌아온다고 해서 내가 피하고만 싶었던 문제들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한 발짝 떨어진 ‘도망칠 구석’에서 한 템포 쉬면서 숨을 고르고 에너지를 채워 문제 해결 전략을 짜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과 돈이 넉넉하다면 ‘여행’이란 도피처로 떠났다. 돈은 있고, 시간이 없다면 휴대전화 메모장의 위시 리스트 ‘음식점’을 클리어해갔다. 시간은 있고 돈은 없다면 ‘낯선 곳’을 정처 없이 걸었다. 시간과 돈, 둘 다 없다면 단 10분이라도 ‘커피 브레이크’를 가졌다. 문제에 휩싸여 머리가 뜨겁고 어지러울 때는 그 안에서 아무리 해결책을 찾으려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머리를 식히고, 호흡을 가다듬으면 의외로 답은 쉽게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인생의 불청객이 있다. 나에게는 ‘번아웃’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우울’, ’ 실패‘, ’ 좌절‘일 수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싶지 않다면, 미리미리 도망칠 ‘심리적 안전지대’를 마련해둬야 한다. 지극히 내 취향으로 꾸며진 작은 원룸일 수도 있고, 잡생각을 없애는 단순 노동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반려동물과 교감하는 시간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품이 안전지대가 된다. 세상의 소음과 단절된 고요한 숲 속의 밤이 마음의 안정을 주기도 한다. 언제 인생의 불청객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지금이라도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나의 ‘도망칠 구석’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