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서툰 선배들을 대신한 변명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일상인 업계의 특성상, 빠르고 적절한 순간 대처는 실력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 부분에 있어서 난 높은 점수를 받기 힘든 성격이다. 낯가림이 신생아 수준인 나는 계획했던 상황과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질 때, 몹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스트레스가 투명도 100%로 얼굴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럴 때 나를 오래 봐온 선배들이나 부장님들은 내게 ‘그란데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네며 말한다.
호사야 스트레스 받지 마!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저런 말이 뭔 소용?
스트레스 받지 말란다고
스트레스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문제가 생길 상황을 아예 만들지를 말지.
생각해보면 난 결코 편한 후배는 아니다. 입으로는 괜찮다 하고 얼굴이 투명해서 힘들면 힘든 티, 싫으면 싫은 티, 불편하면 불편한 티를 내는 스타일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여우처럼 숨기 지를 못하는 것이다. 뭔가 내 의지대로 풀리지 않으면 뭘 입으로 못 넘기는 편이다. 억지로 먹었다가 체해 더 큰 고생을 하는 꼴을 몇 번 본 주변인들은 그래서 내게 끼니때면 식사를 강요하지 않는다. 밥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링거 삼아 들이키며 엉킨 실타래 같은 일을 끌어안고 하나하나 풀어간다. 헝클어진 정신을 다잡고 문제 수습에 나선다. 변화의 대응 방안을 고민하고, 실행한다. 과정이 지랄 맞고 번거롭긴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든 해결된다.
어느새 선배보다 후배가 많아지는 연차가 쌓여가던 어느 날. 나도 후배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스트레스 받지 마!
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차 싶었다. 아... 나도 별 수 없는 선배구나. 어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했지? 이 말을 듣는 후배가 어떤 마음으로 내 말을 받아들일지 어느 정도 예상됐다. 그래도 짬밥을 조금 더 먹은 내가 후배를 위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당황했을 후배를 진정시키고, 문제 수습을 위한 다음 방향을 고민하는 게 선배의 역할이다. 생각해 보면, 본인이 더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선배를 보는 게 더 꼴 보기 싫었을 것이다. 별 것 아니라는 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는 선배의 존재가 더 든든하게 느껴진다.
스트레스 받지 마. 이 무심코 던지는 듯한 단순한 말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선배가 되고서야 알았다. ① 너 힘든 거 충분히 알아 ② 근데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별로 큰 문제 아니야 ③ 너만 힘든 거 아니야 ④ 그러니 우리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 ⑤ 어떻게든 해결 되게 되어 있어 ⑥ 그러니 싫은 티, 힘든 티 좀 적당히 내...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어떤 최악의 상황도 결국 시간은 앞으로 흐르고 끝은 나게 마련이다. 대부분 문제의 책임은 선배들이 진다. 선배들의 페이 안에는 그 책임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후배들보다 많은 돈을 받는 것이다. 후배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고, 실행하며 경험치를 쌓게 된다. 그렇게 후배들은 선배가 되고, 후배들에게는 더 어린 후배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사람은 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만 보이는 게 정해져 있다. 1년 차와 10년 차가 똑같은 걸 본다면 10년 차는 그 무대에서 퇴장할 차례라는 신호다. 반면 연차가 어린데도 폭넓은 시야로 전체를 꿰뚫어 본다면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연차와 능력이 무조건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정상적 사고를 가진 선배라면 후배만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돌아설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위로가 서툰 선배라는 사람들의 함의가 가득한 ‘스트레스받지 마’라는 말에 후배들이 스트레스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길고 장황한 글을 썼다.
만연해 있는 '세대 갈등' 또는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 가슴속에 화만 차오른다. 그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정도로 ‘인정‘하고 넘어가면 서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감정싸움 따위 하지 않게 된다. 스트레스 때문에 괴롭다면 예민한 신경의 촉을 물리적으로 무디게 만들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가 몰려올 촉이 딱 느껴지면 재빨리, 도망갈 구석을 찾는다. 사무실 안에서라면 선배의 어깨 뒤가 되어야 하고, 사무실 밖이라면 뒷담화가 어우러진 치맥 자리가 될 수 있다.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에너지를 채워야 우리는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