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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31. 2020

전진 말고, 직진 말고 때로는 후진

나뭇가지에 끼어 죽은 새가 들려준 끝없는 속삭임


하루에 딱 두 시간, 셀프 강제 칩거에서 해방되는 시간이다.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집 근처 산책로를 걷는다. 시국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한겨울처럼 춥지만 ‘봄’은 성실한 친구처럼, 약속 시간을 잘 맞춰 도착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쌀쌀하지만 한낮의 따사로움 덕분에 봄꽃은 경쟁하듯 꽃망울을 터트린다. 겨울 내 어떤 나무인지도 몰랐던 메마른 가지에 하얗고, 노란 꽃들이 피어났다.


다들 멀리 가지 못하니 가까운 산책로의 봄꽃들을 보며 잠시나마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2020년의 봄을 만끽한다.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린 많은 사람들은 봄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하나 둘 셋. 셔터음에 맞춰 저 마스크 안의 얼굴엔 아마 봄꽃만큼 환한 미소가 가득 차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를 위해 마스크 안에 그 미소를 숨겨야만 한다. 언젠가 먼 훗날, 오늘 찍은 이 사진들을 보며 2020년 봄을 마스크에 갇힌 날들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나뭇가지 가득한 봄꽃들을 보기 위해 평소보다 고개를 조금 더 들어 걷는다. 그러다 꽃은커녕 작은 초록 잎 하나 돋지 않은 나무를 보았다. 2020 s/s 신상으로 도배한 듯 한껏 봄꽃으로 치장한 나무들 사이에 덩그러니 까만 가지만 뻗어 있는 나무가 되레 눈에 띄었다. 생기 하나 느껴지지 않은 나무를 보며, 지난겨울을 버티지 못했나 싶어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보였다. 언뜻 봐도 한 손에도 쥐어질 만큼 작고 여린 그리고 까만 새. 당연히 살아 있는 새라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세히 살폈다. 작은 새는 Y자 나뭇가지 사이에 목이 끼어 있었다.


살아 있어라, 제발 살아 있어라


잠시, 기도하는 마음을 품고 천천히 새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새는 이미 오래전에 숨을 거두었는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달콤한 봄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리는 깃털만이 그것이 새인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아마도 비행 중, 불의의 사고로 그 나뭇가지 사이에 목이 끼었나 보다. 버둥거릴수록 나뭇가지는 새의 목을 조였을 테고, 그 발버둥이 결국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새의 가녀린 목숨을 빼앗아 간 듯싶었다.

앞으로 나가려고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칠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살짝 고개를 들었다면...
그랬다면 이 작은 새는 살아 있지 않을까?
지금쯤 봄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지는 않을까?


탄생의 계절, 봄에 목격한 작은 새의 죽음. 그 과정들을 상상해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 이름 모를 새처럼 작고 여리던 시절, 온 힘을 다해 앞으로 전력 질주하며 살았다. 발버둥 칠수록 목을 조이는 고통 보다,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 내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했다. ‘세상의 잣대’라는 거친 나뭇가지가 목을 조이고, 숨통을 끊기 직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려 빠져나왔다. 겨우 탈출한 내 몸과 마음은 목숨만 겨우 붙어 있지 상처 투성이었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나고서야 알게 됐다. 앞으로 가려고 주는 힘의 딱 1/10 아니 1/1000, 1/10000 정도의 힘을 목 쪽으로 쏟으면 됐던 거였다. 살짝 고개만 들면 됐는데 그 쉬운 방법을 몰랐다. 숨을 고르고 뒤로 슬쩍 몸을 빼면 되는 거였는데 그 방법을 이제야 알았다. 앞으로 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때로는 옆도 보고, 또 뒤로 물러서기도 해야 했다. 겨우 숨을 고르는 그 찰나의 시간, 한 발짝 물러서는 게 아깝고 두려워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면 결국 원하는 목표에 영영 닿지 못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뭇가지에 낀 여리고 작은 새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발목 잡혀 정체되어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애쓰고 발버둥 쳐 보지만 변하지 않는 상황에 체념했을 수도 있다. 사력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작은 새처럼 멍하니 ‘영원한 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전진과 직진이 안 먹힐 때는 어쩌면 후진도 방법이다. 한 발짝 물러서 숨을 고르고, 바닥난 에너지를 채우면서 때를 기다릴 필요도 있다. 앞서 가는 사람 뒤꽁무니를 붙잡으려 내 페이스도 모른 채 달리다가는 결국 고꾸라지게 마련이다. 잠시의 후진은 영원한 포기보다 낫다. 잠깐의 휴식은 더 먼 목표점을 향한 전진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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