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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07. 2020

나를 미치게 하는 거지존

거지존, 그 또한 지나가리라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 가며 초조해졌다. 더 나이 들기 전에 긴 머리를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든 사람은 긴 머리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숱도 볼륨도 사라지는 머리카락의 컨디션이 문제였다. 왜 중년의 어머니들이 짧은 뽀글펌을 고수하는지 그 깊은 속내를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피와 머리카락의 노화는 탐스러운 긴 머리가 어울리지 않는 컨디션을 만들었다.

불혹 전후. 지극히 내 기준에 더 미룰 수 없는 기한이 닥쳤다. 지난가을, 우선 1차 목표로 날개뼈까지 길러 보기로 마음먹었다. 단골 미용실에 가서 자리에 앉은 후 전담 미용사 분에게 말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비장한 장군의 톤으로.


이제 당분간 머리 기를 겁니다.
길이에 큰 변화 주지 말고
기르기 편한 스타일로 다듬어만 주세요.


수 년째 나의 머리를 만져온 미용사 분은 ‘이 다짐이 얼마나 가나 봅시다’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조용히 보내며 머리끝을 다듬어 주었다. 이미 나는 이전에 몇 번 똑같은 말을 내뱉은 전적이 있다. 매번 비장함의 전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난 다시 미용실로 돌아와 칼단발로 쳐달라고 미용사 분께 빌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머리를 다듬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거울을 볼 때마다 당장이라도 미용실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덥수룩한 머리칼을 깔끔한 단발로 자르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쳤다.


단발 스타일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한 번 쯤 겪는 마의 구간, 거지존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어떤 스타일링을 해도 제대로 모양이 나오지 않는 어깨에 닿는 단발 상태인, 거지존. 요즘은 긴 단발이 트레이드 마크인 래퍼 넉살의 이름을 따서 넉살 존이라고도 부른다는 그 위험한 시기. 세상 사람들의 다 나의 엉망진창인 헤어스타일만 보는 것 같은 그 암울한 시기. 그때를 참지 못하면 다시 단발로 복귀할 수밖에 없는 벼랑 끝의 시기. 과거의 나 역시 몇 번의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짧은 단발로 복귀하곤 했다. 하지만 나에겐 다음으로 기약할 더 이상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머리를 감은 후 욕실 하수구 수챗구멍에 쌓인 한층 길어진 머리카락을 확인할 때면 다시 한번 욱하고 커트를 하고 싶은 욕망이 밀려든다. 예전보다 긴 머리카락은 방바닥에 떨어졌을 때,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한다. 머리를 말리고 빗을 때마다 한 움큼씩 떨어진 긴 머리카락을 주울 때마다 생각한다.


이게 다 돈이면
며칠 안에 부자 되겠네


볼품없이 제멋대로 자란 머리카락이 꼴 보기 싫어 지난겨울 내내 머리를 묶고 지냈다. 사이사이 흘러내리는 짧은 머리카락은 판매직 직원처럼 실핀으로 추슬렀다. 그리곤 목도리로 둘둘 감거나 모자를 푹 눌러써 내 헤어 스타일이 어떤지 알 수 없게 감추곤 했다. 그렇게 머리카락에 신경을 끄고 길고 지루했던 겨울을 보냈다.


어느새 계절은 바뀌고 두꺼운 겨울옷을 벗고 가벼운 봄옷을 입을 때가 됐다. 새로운 계절을 맞아 그간 꽁꽁 묶었던 머리를 풀러 봤다. 어느새 머리카락은 손가락 두 마디쯤? 어깨를 넘기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거지존의 시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끝나가고 있었다.


뭘 해도 못생겨 보이고 어떤 스타일링을 해도 답 안 나오는 헤어 스타일의 거지존처럼, 인생도 거지존에 머무를 때가 있다. 무슨 짓을 해도 안 풀리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순간 말이다. 세상 모두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우주 최강 못난이가 된 기분에 휩싸이는 때 말이다. 내 인생 역시 거지존에 머무르던 때가 있었다. 그 외롭고 괴로운 시절에는 지구의 내핵까지 굴을 파고들어 앉곤 했다.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예리한 화살이 되어 나라는 작은 과녁에 꽂히곤 했다. 지독한 패배감과 우울에 휩싸여 나를 자책했고, 스스로를 할퀴었다. 그럴수록 인생의 거지존 기한은 자동 연장됐다.


시간은 흘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같던 난 거지존에서 벗어났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거지존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지존에 대한 신경을 끄는 것부터 시작됐다.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자신과의 심리적 거리두기’쯤 될까? 거지존의 머리카락이 보기 싫어 목도리와 모자로 꽁꽁 숨기고 외면한 채 지루한 겨울을 견딘 것처럼. 내 헤어스타일이 지금 추노인지, 라푼젤인지 관심 스위치를 내리고, 그저 내 할 일을 하며 내 갈 길을 갔다. 요즘 말로, ‘존버’ 정신을 곱씹으며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거지존으로부터 한 발짝 멀어져 있었다. 시간만큼 좋은 약은 없다는 삶의 진리를 다시 한 번 체감했다.


영원한 겨울이 없듯, 그토록 기다리던 봄도 어느새 끝이 보인다. 기세 등등했던 벚꽃도 4월의 눈꽃송이가 되어 하나둘 떨어지고 있다. 시간은 무심하게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거지에게도 부자에게도 하루는 단 24시간이 주어질 뿐이다. 아무리 붙잡으려 애써도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고 시간이 흐르면 뭐든 끝이 난다. 그리고 끝의 끝에는 시작이 닿아 있다.


거지존의 끝에는 새로운 헤어스타일존이 기다리고 있다. 영혼까지 끌어 모으긴 해야 하지만, 이젠 제법 일명 '똥머리'라 불리는 번 헤어도 가능한 길이가 되었다. 번 헤어는 거지존의 계절을 무사히 ‘존버‘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종의 훈장이다.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까지 부지런히 ’ 존버‘해 머리를 기를 것이다. 그래서 올여름이 되면 한껏 머리를 끌어올린 번 헤어를 하고 한강으로 향할 것이다. 번 헤어로 시원하게 드러낸 목선에 시원한 강바람이 닿을 때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맥주를 벌컥 벌컥 들이켜고 싶다. 그 순간만을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터널 같던 거지존을 악착같이 버텨낸 거니까. 그래서 이토록 지리한 거지존의 계절을 견딘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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