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사치인 시대, 저는 사치스럽게 살겠어요
이제 제법 낮이 길어졌다. 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해는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입에는 마스크를 장착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후 사람들과 아름다운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해가 있을 때는 분명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바람도 저녁이 되니 제법 차고 날카롭게 목 사이를 파고들었다. 추위에 약한 난 점퍼의 지퍼를 쭉 올려 찬 봄바람을 막았다. 내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치는데 집중하는 사이, 차가운 봄바람에 벚꽃 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봄 한가운데에서 내리는 폭설처럼.
까르르 까르르
청량 필터를 끼운 청춘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진 건 바로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20대 초반의 남녀. 그중에서도 집 근처였는지 가벼운 홈웨어 차림의 아담한 여자의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소리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본 강아지처럼 흩날리는 하얀 벚꽃잎 속으로 달려들어 꽃잎을 잡으려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손에는 벚꽃이 떨어졌고 벚꽃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서 눈을 감았다. 잠시 무언가를 간절히 빌었다. 옆에 있던 둥근 안경을 쓴 덩치 큰 남자는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한동안 잊고 있던 그 말이 떠올랐다.
떨어지는 벚꽃 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나도 모르는 내 취향을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알아서 관련 콘텐츠와 상품을 척척 대령하는 시대. 모두들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채 말초적인 자극과 ‘좋아요 ‘에 열광하는 사회. 이렇게 갈수록 건조하고 팍팍해지는 세상에 살면서 ‘낭만’과 ‘여유’라는 단어가 사치처럼 느껴지곤 했다. 말랑한 감정은 가지런히 개어 내방 침대 위에 놔두고, 집 밖으로 나올 때는 회색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꺼칠한 표정과 마음을 채워 출발하곤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청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을 맨눈으로 보고 나니 가슴속에 몽글몽글한 기분이 차올랐다. 깨발랄한 몰티즈처럼 벚꽃 눈 사이를 뛰어다니는 여자 친구(?), 그리고 그녀를 사랑스럽게 지켜보는 남자의 모습이 산책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서리태 박힌 백설기처럼 하얀 피부에, 까만 눈동자를 가졌던 그녀는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나도 몰티즈를 닮은 그녀처럼 봄에는 벚꽃잎을, 여름밤에는 별똥별을, 가을에는 낙엽을, 겨울에는 첫눈을 잡으려고 달려들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난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정글 같은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낭만 대신 흑염룡만 차곡차곡 쌓아 왔다.
무심한 듯 시크한 게 멋있는 줄 알았다. 감정에 휘둘리는 건 우습고 유치한 애들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일상에서 낭만은 ‘오글거린다 ‘라는 말로 평가절하하고 원천 봉쇄해버렸다. 먼 훗날, 흑역사로 재생될까 봐 아예 세상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감정들은 결국 딱딱해진 가슴속에서, 머릿속에서 화석이 되고 말았다. 쓰지 않으면 퇴화되는 근육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았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난 뻣뻣한 북어처럼 메마르고 까칠한 사람이 되었다.
뭐든 영원한 건 없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이든 유치하고 촌스러워진다. 흑역사 방지를 위해 팔다리를 잘랐던 감정들도 결국 흑역사가 됐다. 어차피 뭐든 흑역사가 된다는 걸 알고 난 후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기로 했다. 굳이 감추고 포장하느라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입고 싶은 대로 입는다. 그랬더니 까칠했던 얼굴과 인생이 한결 나긋나긋하고 보드라워졌다.
둘 만의 청춘 영화를 찍던 몰티즈 커플과 멀어진 지 한참 후에도 여전히 봄바람이 불면 벚꽃 눈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벚꽃이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도 몰티즈 그녀처럼 팔을 뻗어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벚꽃잎 하나가 손바닥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벚꽃잎이 뭉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먹을 쥐고 잠시 바쁘게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그 평범한 원래의 일상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