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귀를 의심케 하는 그녀의 한마디, "난 여행이 싫어"
약 10년 전... 조무래기 시절 프로젝트 때문에 만나게 되었고 프로젝트가 끝난 후엔 친구가 된 불가사리 양이 있다. 잘 나가는 대기업의 든든한 허리를 맡고 있는 그녀는 소위 말하는 화려한 30대의 커리어 우먼이다. 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프리랜서라는 처지는 천지차이지만 교집합 많은 인맥들과 음식에 관한 지극한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친해진 사이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알코올 한 방울 없이도 밤새 수다를 떨고, 힘들 때 위로받고, 서로를 응원하는 좋은 친구다. 얼마 전, 그녀와 이야기하던 중 나의 귀를 의심케 하는 그녀의 한마디를 듣게 되었다.
응? 이게 무슨 말이지? 여행이 싫다구?? 어떻게 여행이 싫을 수 있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업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큰 프로젝트가 끝나면 매번 끝나기도 전에 휴가 날짜를 잡아 비행기 티켓을 끊었기 때문이다. 해외에 다녀오면 자그마한 선물을 안겨주던 부지런하고 상냥한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녀가 여행이 싫다고 말했을까?
의아한 마음에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타고난 집순이 DNA를 가진 경남 마산 출신의 소녀는 성인이 되어 대학 진학과 취업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집을 떠난다는 자체가 스트레스였고 또 낯선 환경에 적응해 가는데 큰 에너지가 소모되었다고 한다. 남들처럼, 일로 받은 스트레스는 여행을 떠나 풀었다고 한다. 그런데 생활이 안정되고 자기 명의의 안락한 집이 생기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자기 집보다 세상 편한 곳이 없는데 굳이 돈 들여 여행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업무의 특성상 야근도 잦고, 출장도 잦은 그녀의 일상에 있어서 집을 떠나는 여행이라는 행위는 어쩌면 또 다른 숙제이자 업무의 연장 같은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다.
"난 여행이 싫어"라고 말하는 그녀의 한마디에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사실 여행은 커피, 담배처럼 취향이자 기호(嗜好) 일 뿐인 건데... 왜 당연히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내가 좋아하니까 남들도 좋아할 거라는 착각에 단단히 빠져 있던 거다. 구애받지 않는 여행 하는 것, 흔치 않은 여행지를 갔던 것, 여행 경험이 다양한 것에 대해 나는 분명 묘한 우월감에 취해 있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도전적이고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행을 즐겨하지 않는 불가사리 양의 성격은 충분히 도전적이고 상황 대처 능력은 가히 메시급이다. 불가사리 양만 봐도 내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여행 = 일상 탈출 =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단순한 뇌구조를 가진 나 같은 인간에게 불가사리 양의 한 마디는 커다란 경종을 울렸다.
모두가 여행을 좋아하진 않는다. 여행을 많이 한 것을 과시할 필요도 없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숨길 필요도 없다. 여행을 통해 얻는 수많은 것들 보다, 떠나지 않고 집에서 누리는 행복이 더 크다면 그거면 된 거다. 여권에 찍힌 수많은 스탬프 개수 보다, 내 집 내방 내 침대 위에서 뒹굴 거리는 시간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할 수도 있다. 남들 눈치 볼 필요 없다. 여행 말고도 세상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존재는 무수히 많다. 내가 진정 원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 그리고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프로 여행러들의 우쭐거리는 경험담들이 듣기 싫다면 차분하고 당당하게 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