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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07. 2020

어머! 내가 투명 인간이라니?

오늘도 ‘분노의 딱밤’을 적립하게 된 프리랜서의 씁쓸한 현실

※ 표지 그림 - 에세이 <포스트잇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  
     "적 같네! 이놈의 세상 편" 중에서 (ⓒ 모리)


늦은 오후, 마트는 북적였다. 저녁 장을 보기 위해 나온 많은 사람 사이에 내가 있었다. 표고버섯, 곤약, 메추리알, 달걀 한 판. 쇼핑리스트의 물건을 차곡차곡 장바구니에 넣고 계산대에 섰다. 계산을 기다리며 자꾸만 다운되는 기분을 애써 끌어올리려 업 템포의 노래에 집중하던 그때, 내 앞에 낯선 손 하나가 쑥 들어왔다. 그리곤 고구마 한 봉지를 계산대 위에 올려놨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손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새치기를 시도하고 아닌 척 고개를 먼 산으로 돌리고 딴청을 피우던 중년의 한 사람. 짜증이 확 올라왔다. 얼굴 가득 불쾌한 표정을 장착하고 최대한 목소리를 깐 후 건조한 투로 말했다.      


저.기.요. 저 지금 줄 섰는데요? (= 지금 새치기하려고? 너님 눈엔 내가 줄 선 거 안보이니?)

아이구... 올려만 놓은 거야. 올려만 놓은 거.

    

얼씨구? 새치기나 하는 양심리스 주제에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까지? 꾸덕한 내공을 가진 진상의 기운이 느껴졌다. 눈으로 레이저를 쏘는 나를 의식했는지 슬쩍 고구마 봉지를 회수해 계산대 줄 끝으로 가서 선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보통 상태의 나라면 계산할 게 하나니까 먼저 하시라고 양보했을 거다. 하지만 그 사람은 타깃을 잘못 택했다. 오늘 내 기분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안고, 심지의 불을 겨우 겨우 꺼가고 있는 중이었다. 확인하진 않았지만 아마 오늘의 운세 혹은 바이오리듬이 최악인 날이 분명했다.       


룰루랄라 마트로 오는 길.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지긋지긋한 프리랜서의 그지 같은 현실과 강제로 마주하게 한 통화. 그.놈.의.내.부.사.정. 때문에 약속했던 입금 날짜가 미뤄진다는 전화였다. 그 입금 날과 금액을 감안하고 벌려 놓은 일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진다는 뜻이다. 이 바닥이 다 그런 거니까. 안 준다는 게 아니라 정산이 늦어지는 바람에 지급이 좀 늦어지는 거니까.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이해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 ‘이해‘는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디폴트 값이니까 이번도 이해를 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쩜 그 레퍼토리는 진화도 하지 않는 걸까? 짜증이 울컥 차올랐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많이 화가 났던 이유는 ‘후려쳐짐’이 아니라 그 ‘후려쳐짐’을 당하고서도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하는 내 현실 때문이었다. 약속과 다르지 않냐고. 일 시킬 때는 칼 같더니 대가를 지불할 때는 왜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사람 역시 나에게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일 뿐, 결제 담당자나 대금 집행자는 아니다. 그러니 따지거나 화를 내는 게 의미가 없었다.      


일로 자아실현 따위를 찾을 나이도 훌쩍 지났고, 그 프로젝트로 대단한 명성을 얻으려고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난 일을 무사히 마치고 찍히게 될 통장의 숫자만 바라보고 내 몫의 역할을 했을 뿐인데... 프리랜서에게는 그 당연한 내 몫을 챙기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끓어오르는 이 순간의 화를 참으면 다음에 얼굴 붉히지 않고 상대를 대할 수 있다. 분란을 만들지 않아야 미뤄진 날짜라도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 그 알량한 일말의 희망을 곱씹으며 울분을 가라앉혔다. 오랜 시간 ‘을 of을’로 살아온 뼈에 박힌 습관이자 생존 방식이다. 이 씁쓸한 현실이 내 입에는 너무 써서 이제 그만 맛보고 싶다.


뻔히 내가 줄 서 있었는데도
새치기해도 되는 사람.
뻔히 내가 일을 했는데도
페이 지급은 뒤로 미뤄도 되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인 걸까?
그들에게 난 투명 인간이었을까?  

    

세상에나 내가 마블 히어로도 아닌데 초능력자였다니. 투명인간 취급해 주는 인간들 덕분에 나도 몰랐던 나의 초능력을 알게 됐다. 고맙네 참. 젝일. 어쨌건 투명 인간 취급 말고, 진짜 투명 인간이 되고 싶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투명한 모습으로 사회 질서를 흩트리고, 책임은 뒷전이고 권리만 챙기는 이들 곁에 조용히 다가가 ‘분노의 딱밤’이라도 날리고 싶다. 이런 웃픈 망상을 하며, 오늘도 프리랜서의 고단한 하루를 버티고 또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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