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Sep 28. 2020

서랍 속에서 필요한 나를 꺼내 ‘써’ 먹어요

멀티 페르소나 시대를 사는 법

빨래 요정이 사랑하는 계절이 왔다. 습기 없이 뽀송한 바람이 불고, 낮이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가을. 이 정도 날씨면 보통 하루 반나절이면 축축했던 빨래는 바삭하게 마른다. 건조대에 널어둔 빨래를 탁탁 털어 차곡차곡 갠다. 단정하게 접은 빨래가 돌아갈 곳은 원래의 ‘집‘이었던 서랍장이다.      


내 방 서랍장은 5층 빌라처럼 총 다섯 개의 서랍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는 주로 유행 지난 티셔츠와 잠옷 등 집에서 입는 옷과 트레이닝 바지, 레깅스 같은 운동할 때 입는 옷들이 자리 잡고 있다. 2층에는 청바지, 스커트, 면바지 등 하의류, 3층에는 부피가 있는 니트와 맨투맨, 후드티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4층에는 사시사철 가장 자주 입는 티셔츠 같은 상의, 작은 서랍이 두 개로 나눠진 5층 꼭대기 칸에는 양말과 손수건, 스카프 등 작은 소품들이 들어 있다. 그래서 아예 빨래를 갤 때부터 각 서랍에 들어갈 종류별로 모아 둔다. 그러면 서랍에 넣기 위해 다시 재분류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곱게 접은 빨래를 원래 있던 층의 서랍장에 넣으면 겨울 양식을 비축한 다람쥐라도 된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 가슴에 찬다. 보송보송하게 마른 옷들을 가지런히 종류별, 색깔별, 재질별로 분류해 서랍에 넣으며 생각했다.


그래, 그때 나를 이렇게
분리해서 수납했어야 했어.


나라는 사람은 한 명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수 없이 많다. 딸, 동생, 누나, 이모, 친구, 선배, 후배, 작가, 독자, 팬, 소비자, 클라이언트, 손님, 걸어가는 행인 1, 네티즌 등등 마치 연극 속 멀티맨처럼 때로는 이 사람, 때로는 저 사람이 되어 하나의 몸으로 여러 사람이 되어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야 한다.    

  

한때는 나라는 ‘본캐‘로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단순히 일 문제를 지적을 받았을 뿐인데 나라는 인간 자체를 부정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 제일가는 ’ 루저‘가 된 기분이었다.      


남들은 술술 쉽게 잘도 풀리고,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 자기 갈 길 잘 가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나는 왜 이리도 모자라고, 멘털은 연약한지... 왜 나는 나일까? 못난 나를 향해 뾰족한 화살을 끊임없이 쏘아대며 지독하게 미워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갈수록 내가 더 미워질 뿐. 자신을 원망하며 소중한 날들을 낭비하기엔 인생이 짧았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책을 뒤지고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 또 먼저 이 길을 갔던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시간이 쌓여 서서히 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무수한 사람들의 조언들이 이어졌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자. 아. 분. 리.‘ 나라는 몸뚱이는 하나지만, 각 장소와 상황에 맞게 역할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하러 갈 때는 서랍장 1층에서 레깅스와 티셔츠를 꺼내야 하는 것처럼. 중요한 자리에 갈 때는 3층의 후드티가 아닌 옷장에 걸린 재킷과 슬랙스가 필요한 것처럼. T.P.O에 맞는 옷을 서랍에서 꺼내듯 상황에 따라 내 자아를 분리해서 내놓아야 한다.      


일터로 향할 때는 ‘나’라는 서랍장의 첫 번째 칸에서 ‘일하는 나’를 꺼낸다. 일로 지적받았다면 일터에서 그 문제를 지지고 볶든 해결하고 온다. 오늘 해결 못 했다면 내일 다시 가서 해결한다. 굳이 집까지 그 꿀꿀한 기분의 ‘일하는 나’를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 회사 문밖을 나서는 순간, 일개미 모드 스위치는 내린다. ’ 일하는 나‘의 영업 종료 표시를 내 걸고, 셔터를 내려야 한다. 그렇게 의도적으로라도 분리하지 않으면 난 늘 모자란 사람, 부족한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잘근잘근 곱씹으며 자괴감의 늪에 빠지게 된다. ’ 일하는 나’의 캐릭터는 일터에 벗어두고, 내 일상에 돌아오면 다시 나라는 서랍장에서 내가 원하는 캐릭터를 장착한다.      


내 안에는 다양한 내가 있다. 나라는 ‘본캐‘외에 일하는 나 말고도 글 쓰는 나, 쇼핑하는 나, 산책하는 나, 덕질하는 나, 하소연을 들어주는 나, 조언하는 나, 잔소리를 듣는 나 등등 다양한 ’ 부캐’가 존재한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부캐’를 활성화해야 한다. 부캐들이 인정받고 존중받으면 자연스럽게 자존감이 차오른다. 그 에너지는 고스란히 나라는 본캐를 바로 세운다. 빵빵하게 충전된 에너지만 있다면 그 어떤 자존감을 갉아먹는 자존감 도둑, 에너지 뱀파이어들을 만나도 굳건하고 의연하게 버틸 수 있다.


그 당당한 마음가짐과 자세는 고스란히 결과로 드러난다. 그게 일이든 인간관계든 사랑이든 말이다. 그래서 종류별, 재질별로 가지런히 채워진 서랍 속 옷들처럼 내 부캐들이 어디에 어떻게 수납되어있는지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부캐’가 필요할지 모르니까.







** 온라인 서점 구매 링크 **
 
예스 24
http://m.yes24.com/Goods/Detail/91909561

교보문고
http://mobile.kyobobook.co.kr/showcase/book/KOR/9788968332715?partnerCode=NVM&orderClick=mW5

인터파크
https://mbook.interpark.com/shop/product/detail?prdNo=337759166

영풍문고
http://www.ypbooks.co.kr/m_detail_view.yp?code=101046813

알라딘
http://aladin.kr/p/5NxIj


매거진의 이전글 출간 한 달, 이런저런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