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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Oct 05. 2020

난 전생에 양파였나? 사는 게 왜 이리 맵지?

고기와 양파가 듬뿍 들어간 카레를 만들며 생각한 것들

감자보다 고기가 월등히 많은 ‘고기 듬뿍 카레’가 먹고 싶었다. 난 내 마음대로 메뉴를 고를 수도 있고, 채소와 고기의 비율을 내키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어엿한 성인이다. 동시에 난 신용 카드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우 코너를 못 본 척 지나친 후 신용카드를 건네고 호주산 청정육 안심을 받았다. ‘고기 듬뿍 카레’가 먹고 싶은 거지 ‘한우 듬뿍 카레’를 먹고 싶은 건 아니니까...라고 나를 토닥였다. 아니 빈약한 내 통장을 토닥였다.      


이제 카레 정도야 눈 감고도 만드는 메뉴다. 포슬한 감자도 색깔이 예쁜 당근도 필요 없다. 이번엔 고기 듬뿍 카레를 만들 거니까 카레의 단골 재료 채소들은 제외한다. 다른 채소들은 다 빠진다 해도 ‘양파’만큼은 빠질 수가 없다. 익히면 수분이 빠지면서 양이 줄어드니까 원래 생각했던 양보다 넉넉하게 준비한다. 대체 양파의 정량이란 있는 걸까? 양파가 많이 들어가서 맛이 망가지는 음식은 없었다. 원래 성인 주먹 크기의 양파 1개를 넣으려다 하나 더 준비해 2개를 썬다. 사각사각 양파를 썰면 양파의 매운 기운이 눈을 강타한다. 양파 2개를 써니 2배로 눈물을 흐른다.       


이야! 이 양파 독이 제대로 올랐네.     


주방이 양파의 매운 냄새로 가득 차면, 뜨겁게 달군 궁중 팬에 버터를 넉넉히 넣고 녹인다. 버터가 녹아 노란 액체 상태로 보글보글 끓으면 산더미처럼 쌓인 양파를 쏟아붓는다. 흡사 중국집에서 짜장 소스를 만드는 느낌이지만 난 그저 고기 듬뿍 카레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나무 주걱으로 양파를 볶으면 금세 숨이 죽는다. 일명 카라멜라이징, 양파가 갈색이 될 때까지 볶는다. 이게 감칠맛 나는 ‘카레의 킥’이라고 티브이에 나온 어느 요리 전문가가 말했다. 이성과 자아는 잠시 에이프런 앞주머니에 넣어두고 양파 볶는 기계가 된 것처럼 영혼 없이 양파를 뒤적인다. 매운 향기가 가득했던 주방엔 어느새 달큼한 양파 익는 냄새로 찬다.   

     

양파는 왜 열을 가하면 단맛이 날까?     


갑작스러운 물음표 공격에 지체 없이 스마트폰을 켰다. 검색창에 #양파 #단맛 #열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친절한 온라인 세상 전문가들은 이미 답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알리신(allicin)때문이라고 했다. 양파를 비롯해 마늘 등 향신채소의 매운맛과 동시에 독한 냄새를 풍기는 성분인 알리신. ‘변신의 귀재’인 알리신은 열을 가하면 단맛으로 변한다. 그래서 생으로 먹었을 때보다 볶거나, 굽거나 익히면 단맛이 강해진다.      


어쩌면 사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인생의 단맛이 느껴지는 순간, 뒤를 슬쩍 돌아보면 달달 볶이던 과정이 꼭 있다. ‘인생’이란 뜨거운 팬 위에 올려진 나는 쉴 새 없이 뒤적여지고, 뒤집히고, 형체가 없어지도록 으스러졌다. 정신없이 볶아진 후 한숨 돌릴 때 달달한 사는 맛이 느껴졌다. 몇 달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만큼 혹사에 가까운 스케줄을 견딘 후 맞이한 프로젝트 쫑파티 날 마신 얼음 생맥주의 짜릿함. ‘이 일 끝나기만 해 봐라! 내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놀 거야 ‘라는 심정으로 힘들 때마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은 위시 리스트를 일이 끝난 후 하나씩 클리어할 때의 기쁨. 식이조절과 운동으로 혹독한 다이어트를 하다가 보름 만에 갖는 치팅데이 때 고심 끝에 고른 메뉴, 떡볶이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환희. 온종일 땡볕 아래에서 육수를 쏟고, 다리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일하다가 들이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의 위로. (어째 다 먹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그 마침표들이 찍히면 독하게 올랐던 매운맛은 날아가고, 단맛이 찼다. 그 달달함은 매운맛 가득한 날들을 견딘 자가 받는 ‘상’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양파를 볶다 보니, 어느새 양파는 갈색 옷을 단단히 차려입었다. 두툼하게 썬 고기를 살짝 볶다가 약간의 물을 넣고, 고형 카레를 풀었다. 농도 조절은 우유로 하니 카레의 맛도 향도 부드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레는 완성됐다. 바로 먹지 않고, 하루 묵히기로 한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카레는 ‘어제의 카레‘니까. 다음날, 드디어 카레를 맛보는 시간이 왔다. 수저에 두툼한 고깃덩이와 함께 카레를 가득 떠서 입에 넣었다. 오랜 시간 정성스레 볶아 형체는 사라졌지만 설탕을 넣은 듯 달달한 감칠맛이 고기를 감싸고 있었다. 양파의 연육 작용 때문인지 고기는 부드럽게 씹힌다. 역시 나에게 양파는 모자라는 것보다 넘치는 게 나은 유일한 채소다.       


‘고기 듬뿍 카레’를 먹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나는 양파처럼 달달 볶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만두고 싶다고, 때려치우고 싶다고 손을 탁 놓고 싶다. 하지만 양파가 듬뿍 들어간 카레를 먹으며 힘이 빠졌던 손과 연약해진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지금 볶이지 않으면, 내 안의 알리신(allicin)은 평생 아리고 매운맛으로만 남을 거다. 그러니 지금의 ‘볶음 당함’을 즐겨 보자. 이 지루한 삶의 매운맛이 볶아져야, 열이 들어가야 달달함으로 바뀔 테니 그날을 기다려 보자고. 양파의 달큼함이 가득한 ‘고기 듬뿍 카레’ 한 그릇을 싹싹 비우니 그제야 배도, 기운도 꽉 차올랐다.



 ※ 참고로 표지 사진은

      카레 전문점에서 ‘사’ 먹은 카레일 뿐!

      집에서 밥을 달 모양으로 만들

      열정은 없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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