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도 ‘불 조절‘이 필요해
올해도 어김없이 차례 음식 준비는 오롯이 엄마와 딸의 몫이었다. 명절 전 부치기 경력 30년 차가 넘는 나는 우리 집에서 ‘전의 요정‘으로 불린다. 올해는 <동태전>, <꼬치전>, <동그랑땡>, <두부전>, <녹두전>, <김치전>, <연근전>까지 총 7종이 추석 차례상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창때에 비해서 종류도 양도 줄었지만 손 많이 가는 건 여전했다.
오전에 밑 작업을 마치고, 이른 점심을 먹은 후 본격적인 전 부치기 작업에 돌입한다. 두 개의 휴대용 가스버너에 각각 프라이팬을 올려 동시 진행을 한다. 시간 단축을 위한 과감한 영역 확장이다. 이때, 느지막이 일어난 남동생이 슬쩍 눈치를 보며 머리를 자르러 가겠다며 채비를 했다.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는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 던졌다.
(헤어) 샵 예약했어?
아니
예약 안 했으면 앉아.
눈치 안 보고 ‘전‘ 편하게 먹고 싶으면 몇 개라도 뒤집고 가!
난 내 동생이 양심과 상식이란 게 있는 사람이란 걸 믿는다.
저걸 보고도 냉큼 발길이 떨어질 만큼 냉혈안은 아니잖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전 재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의 요정’의 예민 지수가 급상승하는 명절. 동생은 더 튕겼다가는 ‘요정’의 입에서 어떤 험한 말이 나올지 충분히 예상되는 짬을 가졌다. 더 이상의 반항은 접어 두고 체념한 얼굴로 프라이팬 앞에 앉았다. 뜨겁게 달군 팬에 기름을 두르고 차근차근 전을 부쳤다.
이 ‘전의 지옥‘에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던 동생은 브레이크 없이 폭주했다. 기름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전은 속도 익지 않았는데 겉만 타버렸다. 평소 자기 먹을 라면이나 볶음밥, 비빔밥을 제외하면 가족 모두를 위한 음식 만드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동생이다. 그의 요리 내공을 알기에 차오르는 화를 꾹 누르며 가스버너의 불을 줄였다.
동생아 워워! 전은 불 조절이 관건이야.
불을 다스리는 자!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전을 얻게 될지니!!
‘전의 요정’이 명한다!
사파이어처럼 저 파란 불꽃에서 눈을 떼지 말거라!
마치, 사랑하는 애인을 보듯 섬세한 눈길로!
인터넷에서 본 인상 깊은 짤들이 있다. 요리에 관심이 없거나 요리를 못하는 일명 ‘요리 고자’들의 특징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한 것이었다.
내 주변의 요리 고자들만 봐도 그랬다. 그들의 사전에는 ‘약불’과 ‘중불’이란 게 존재하지 않다. 불이 닿으면 익을 테니 불의 세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요리 고자들에게 ‘강불’은 이 지긋지긋한 요리 지옥을 탈출하게 해주는 소중한 ‘마법 열쇠‘였다.
불 조절의 중요성을 따졌을 때, 일반적인 요리가 ‘커피‘라면 전은 ’T.O.P‘다. 자칫 방심하면 망치기 쉬운 섬세한 음식이 바로 전이다. 불이 약하면 기름만 먹고 전은 맛이 없어진다. 또 불이 세면 겉만 타고 속은 익지 않는다. 초반에는 뜨겁게 팬을 달궈 팬에 기름을 먹이고, 전을 올린다. 어느 정도 익으면 불을 줄인 뒤 뒤집어 반대편까지 노릇하게 익혀야 한다. 그래야 안은 촉촉하고 겉은 노릇노릇하고 바삭한 맛있는 상태로 익는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생에도 ‘불 조절‘이 관건이다. 때로는 강불이, 때로는 중불이, 때로는 약불이 필요한 순간이 다 따로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강불이 최고인 줄만 안다. 다들 얼마나 빨리 ‘인생’이라는 요리를 완성해 내는지에만 급급하다. 재료 간의 조화는 어땠는지, 간은 잘 됐는지, 얼마나 속이 잘 익었는지, 보기에도 좋고 맛까지 좋은지 따지지 않는다. 결과를 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강한 불로 세게 달린다. 그렇게 요리한 인생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 속은 설익고 겉만 시커멓게 탄 음식도, 쓰레기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가 되어 망연자실해 주저앉는다. 인생의 맛은 둘째치고 인생 자체를 망쳐 버린 것이다.
제대로 예열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팬에 뛰어들면 ‘전’은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 어렵다. 인생도 충분한 워밍업이 필요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남들은 벌써 요리 완성 단계인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다. 조급해할 필요 없다. 누군가는 라면처럼 5분 만에 뚝딱 완성되는 음식 같은 인생을 살 사람도 있다. 또 누군가는 곰탕처럼 24시간을 내리 끓여야 제대로 맛이 우러나는 음식 같은 인생을 살 사람도 있다. 더 나아가 몇 년을 묵혀야 사람마다 맛이 제대로 배는 묵은지 같은 인생을 살 사람도 잇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맛도 모양도 다른 자신만의 ‘인생’이라는 요리를 하고 있다.
각자의 인생 시기에 따라 강불로 뜨겁게 우르르 끓일 때도 필요하지만, 중불로 속까지 충분히 익히고, 때로는 약불로 줄여 뜸을 들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 삶이 맛있게 무르익는 순서와 절차를 무시해버리면 결국 설익은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만다. 당신의 맛있는 인생을 위해,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내 인생이 맛있으려면
지금은 어떤 불이 필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