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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16. 2022

자발적 케이크 셔틀은 그만둡니다

혼자 잘해주고 혼자 서운해하기 금지


단 음식을 즐기지 않는다. 청량음료나 액상과당이 듬뿍 들어간 제조 음료를 굳이 내 지갑을 열어 사 먹는 일은 거의 없다. 유행의 물결에 탄 마카롱, 에클레어, 크림 도넛도 초반에 호기심으로 한 두 번 먹어 볼 뿐이다. 케이크 역시 호들갑을 떨며 그림 같은 자태를 카메라에 담은 후 2~3번의 포크질이면 그 역할은 충분했다. 하지만 케이크 사는 걸 좋아한다.      


케이크가 등판하는 시점은 정해져 있다. 보통은 생일이고 축하와 기쁨이 있는 날이면 케이크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큼지막한 케이크 위에 초를 꽂고 노래를 부른 후 불을 끄고 케이크를 잘라 나눠 먹는 일. 분명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인데도 케이크가 하나 얹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날이 된다.      


케이크를 살 때는 제일 먼저 받는 사람의 취향을 생각한다. 고소한 치즈 케이크인지,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인지, 쌉쌀한 녹차 케이크인지...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가을에는 구황작물이 올라간 고구마 케이크나 밤으로 만든 몽블랑 케이크, 크리스마스에는 통나무 모양의 부쉬 드 노엘인지... 상황에 따라 메시지가 담긴 레터링 케이크, 서프라이즈 이벤트가 필요할 때는 돈이 뽑혀 나오는 용돈 케이크, 밀가루를 멀리한다면 떡케이크까지... 이도 저도 모를 때는 무조건 딸기 생크림 케이크로 통일한다.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 내가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보낸다’는 메시지도 잊지 않는다. 


이토록 집요한 케이크를 향한 집착 덕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케이크 요정’이 되기를 자처하곤 했다. 여기서 ‘케이크 요정’이란 케이크가 필요한 자리에 케이크를 구매 및 공수해 오는 사람을 뜻한다. 내가 몇 날 며칠 고심해서 고른 케이크가 그 자리를 빛내고, 또 주인공이 케이크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나 역시 주인공만큼이나 즐거웠기 때문이다. 케이크가 필요한 날짜가 정해지면 주인공의 성향과 취향을 분석해 케이크를 고르고, 예약하고, 당일날 픽업한 케이크를 온전한 상태로 파티 장소까지 데리고 오는 일은 그 자체로 신이 났다. (특히 날씨가 더운 날에는 예민한 케이크가 쉽게 녹아내리기 때문에 동선과 시간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케이크의 자태가 드러났을 때 쏟아지는 환호, 주인공의 얼굴에 퍼지는 환한 미소, 케이크를 앞에 두고 찍는 시끌벅적한 기념사진,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을 때 그 안에서 펼쳐지는 맛의 대축제... 이런 상상 덕분에 파티 장소로 향하는 뚜벅이 ‘케이크 요정’의 발걸음은 가벼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케이크 요정’으로 변신하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엄숙한 클래식 공연장에서 나 홀로 트월킹을 추는 기분을 느꼈다고 할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자처한 짓인데도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케이크를 향한 확연한 온도 차를 느낀 순간 케이크 요정의 날개는 꺾였다.      


나도 사람인지라 은근히 기대했었나 보다. 몇 달 전부터 예약 전쟁을 해야 거머쥘 수 있는 한정판 케이크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급 파티셰의 손길이 닿은 금테 두른 케이크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떡잎 시절부터 계약 재배한 제철 과일이 넘치게 담긴 시즌 한정 호텔 케이크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주인공이 되던 날, 내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의 공장제 케이크를 마주한 순간, 표정 관리하기 힘들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근육 세포 하나하나가 수다스럽게 내 뇌에 전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프랜차이즈 빵집의 케이크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평소 프랜차이즈 빵집의 케이크를 먹으며 상향 평준화된 대한민국 케이크 수준에 대해 감탄했던 나였다. 하지만 동네 번화가 횡단보도마다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살 수 있는 흔한 케이크를 소중한 날 데려가는 건 ‘케이크 요정’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케이크를 받을 주인공을 생각했다. 특별한 날이니까 흔하지 않은 엄선한 케이크를 안겨주고 싶었다. 예약이 까다로워도, 시간이 걸려도, 동선이 꼬여도 받는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그깟 수고로움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내가 까다롭게 골라 애지중지하며 데려온 특별한 케이크는 대다수에게는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 출신 케이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심지어 이동통신사 멤버십 카드 할인받는 기쁨은 덤까지 있었다.

    

수제 케이크 못지않게 부드러운 프랜차이즈 빵집 출신 케이크를 우물우물 씹으며 인정해야 했다. <상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내 흥에 취해 필요 이상 잘해 주고 혼자 서운해하기> 지긋지긋한 내 특기가 또 발동했다는 사실을. 분명 다디단 케이크일 텐데 그날 내 입에는 사약보다 더 썼다. 잘 넘어가지 않고 입에서만 맴돌던 케이크를 억지로 목에 넘기며 몇 가지 다짐도 함께 삼켰다. 준 만큼 돌아오길 기대하지 말자. 내가 돌려받지 못해도 서운해하지 않을 딱 만큼만 잘해주자. 내 몸에 불량식품만큼 해로운 서운함을 혼자 키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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