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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Feb 04. 2021

단골 카페의 커피 맛이 바뀌었을 때

누릴 수 있을 때 누리자. 악착같이!

틀어박히기 좋은 단골 카페가 있다. 위치, 매장의 크기, 콘센트의 개수, 손님의 밀도, 음악 선곡, 서비스, 가격 등 여러 부분에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모든 게 내 기준에 적당한 곳. 작업을 위해, 사람을 만날 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별 고민 없이 향하곤 했다. 오가며 들르다 보니 어느새 가장 편한 카페가 되었다. 가는 시간이 일정하기 때문에 알바생의 얼굴도 어느 정도 안다. 하지만 지극히 내향성 인간인 나는 커피 주문 외에 사적인 대화를 시도한 적은 없다. 손님과 알바생, 그 보이지 않는 선을 넘지 않는다.      


오늘 내로 넘겨야 할 일이 있어 점심이 지난 오후, 평소처럼 카페에 도착했다.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습관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카드를 건넸다. 그런데 카드를 받아 든 마스크 너머의 알바생 눈매가 낯설다. 예리한 칼날을 닮은 얇은 눈매의 청년이 아닌 순둥한 동그란 눈매의 낯선 청년이 거기 있었다. 새로운 알바생이 왔구나. 커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이전 알바 청년의 행방을 궁금해하며 커피를 첫 모금을 마셨다. 커피가 혀에 닿자마자 뭔가 제대로 잘못됐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컼... 커피 맛이 왜 이래?     


내가 이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는 산미 없이 적당히 씁쓸한 커피 맛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하루아침에 원두를 바꾸지도 않았을 테고, 커피를 내리는 기계를 바꾼 것도 아니다. 그저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이다. 새로운 알바생 손에서 탄생한 커피는 오직 향도 없이 그저 쓰기만 했다. 쉽게 말해 탄 콩을 물에 우린 맛이었다. 커피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벌써 칼 같은 눈매의 시크한 알바생이 그리워졌다. 이걸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제 막 카페 알바를 시작한 신입에게 굳이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분명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닥까지 끌어 온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을 거다. 나까지 굳이 짐을 얹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대신 한 모금 마신 커피를 테이블 저 멀리 밀어뒀다.      


입맛에 맞지 않아 멀리 미뤄둔 단골 카페의 새 커피. 짜게 식어가는 그 커피를 한참 지켜봤다. 적도 부근의 태양 아래 꽃에서 열매가 되고, 다시 포대에 담겨 커다란 배를 타고 머나먼 한국 땅에 왔을 원두. 뜨거운 불 위에서 로스팅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런 비극적 운명에 처할지 몰랐겠지?     


최근 주변에서 크고 작은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다. 단골 카페의 알바생이 바뀌었고, 가끔 가서 구경하던 옷 쇼핑몰의 주인이 바뀌었다. 묘하게 옷 스타일이 펑퍼짐해졌고, 사진 톤도 낯설다 싶어 천천히 쇼핑몰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아니나 다를까 쇼핑몰 하단의 대표 이름이 바뀌었다. 근 7~8년 넘게 꾸준히 지켜봐 왔던 쇼핑몰의 변화가 달갑지 않았다. 몇 주 지켜봤지만, 예전의 텐션이 올라오지 않았다. 이름과 쇼핑몰의 UI는 그대로지만 주인이 바뀌었으니 주인 스타일대로 가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주인의 스타일과 내 취향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렇게 단골 카페처럼 이 쇼핑몰도 조만간 나의 즐겨찾기 목록에서 삭제될 게 분명했다.      


카페의 위치도, 인테리어도 그대로다. 다만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 바뀌니 커피 맛이 달라졌다. 인터넷 쇼핑몰의 이름도 그대로고, 주소도 그대로지만 주인이 바뀌니 파는 옷 스타일이 달라졌다. 겉모습이 그대로라고 해도 그 안의 사람, 즉 주체가 바뀌면 전체가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지 상품을 파는 것이지만 그 상품 안에는 파는 사람의 솜씨와 눈썰미가 그대로 담겨 있다. 내가 사랑했던 그것들에 변화에 느껴지면 서운했다. 내가 공들여 찾은 내 취향의 무언가가 사라져 버린 허무함. 그리고 다시 그 편안함을 느낄 수 없다는 아쉬움이 담긴 감정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새것의 신선함보다 익숙함을 쫓는다. 새 옷, 새 사람, 새로운 경험이 안겨주는 기쁨보다, 새로운 영역을 파악하고 적응하는 과정이 피곤해서다. 그래서 만나던 만나, 가던 곳에 가고, 먹던 음식을 먹는다.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이 무너지는 시국.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적응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 같은 인간에게 가혹한 계절이다. 곳곳에 임대 문의 종이가 나붙고, 늘 보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어려워졌다. 좀 식으면 괜찮을까 싶어 미뤄뒀던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셨지만 역시나였다. 불신의 강을 건너버린 커피가 식는다고 맛이 되돌아올 리 없다. 커피 맛보다 입이 더 썼다. 씁쓸함이 밀려오는 가슴을 도닥이며 생각했다. 영원할 거 같은 익숙함도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으로 누릴 수 있을 때 누리자.  악착같이.  나를 웃게 하는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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