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엉덩이를 끌어올릴 티라미수 같은 말
토요일 아침 일찍 산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씻은 후 엄마와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내가 정한 일주일을 마감하는 루틴이다. 주중은 업무에, 일요일은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시간을 나누다 보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보통은 토요일 점심에 엄마와 외식을 한다.
그날의 목표는 조개찜.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조개찜을 먹자며 낯선 동네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라온 영업시간과 달리 1시에나 가게를 연다는 공지가 모녀를 가로막았다. 할 수 없이 근처에 먹을만한 곳들을 찾아 고개를 돌리니 분주하게 배달 오토바이가 오가는 깔끔한 횟집이 보였다. 평소라면 자의로 게다가 내 돈 주고 먹을 일 없는 메뉴 중 하나가 바로 '회'다. 하지만 엄마와 함께라면 예외다. 전반적으로 날음식을 즐기지 않는 가족들 때문에 본인이 주인공이 되는 날이 아니라면 대개 엄마는 돼지갈비, 삼겹살 같은 가족들이 즐기는 메뉴를 따른다. 엄마와 나 단둘이 먹는 밥이니 오늘은 엄마 위주로 가기로 했다. ‘너는 안 좋아하는 거 아니냐 ‘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엄마를 이끌고 횟집 문을 열었다.
광어+우럭+모둠 해산물이 한 접시에 담긴 세트 메뉴에 맥주 한 병을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해치웠다. 토요일 점심 치고는 묵직한 가격에 낮술까지 곁들인 좀 이상한 날이었다. 매운탕도 안 먹었는데 배는 꽉 찼다. 배는 부르지만 디저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근처 백화점 안의 별다방으로 향했다. 주말이면 몇 배는 더 북적이는 백화점 별다방에 굳이 간 이유가 있다. 가장 가까웠고 무엇보다 엄마가 만보기 앱으로 포인트를 모아 바꾼 커피 쿠폰을 쓰기 위해서다. 하루에 1만 보를 걸으면 100원이 모인다. 그걸 모으고 모아 딸과 커피를 마시는 게 엄마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보통 별다방에 오면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엄마는 샷 1개만 넣은 연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블루베리 쿠키 치즈 케이크 조합으로 주문한다. 그런데 그날은 쇼케이스 안의 티라미수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래 오늘은 티라미수구나 싶었다. 잠시 후 커피와 티라미수가 든 쟁반을 조심조심 들고 와 자리에 앉았다. 각자 앞에 커피를 나누고 티라미수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저트래. 티라미수."
칠십 평생 처음으로 티라미수를 마주한 엄마. 네모난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든 까만 무언가 앞에서 엄마는 고민스러운 듯 포크를 들었다 놨다 했다. 잠시 후 결심이 섰는지 조심스럽게 까만 코코아 가루가 올라간 부분만 슬쩍 떠서 맛을 보신다. 쌉쌀한 카카오 파우더 맛만 느껴졌는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나는 주절주절 설명이 아니라 행동으로 시범을 보여야 했다. 누운 적의 심장을 찌르듯 포크를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층층이 쌓인 에스프레소를 적신 스펀지케이크와 마스카포네 치즈, 카카오 파우더가 한꺼번에 포크 위에 올라왔다. 엄마도 곧 나를 따라 제대로 잘린 티라미수를 한 입에 넣었고, 눈이 똥그래졌다.
"세상에! 이거 되게 맛있다. 이런 맛이 있어?"
"그치? 맛있지? 이탈리아어로 티라미수가 '나를 끌어올리다 = 나(mi)를 끌어(tira) 올리다(su)'라는 뜻인데 정말 맛있어서 먹으면 몸이 하늘로 붕 뜨는 듯 기분이 좋아진다는 의미래. 공장 제품도 이 정도인데 이탈리아 가서 진짜 수제 티라미수를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언제쯤 이탈리아에 갈 수 있을까?"
"근데 이것도 엄청 맛있어"
아직 이탈리아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수없이 티라미수를 먹었다. 이렇게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나오는 공장 제품부터, 개인 카페에서 만든 수제 티라미수, 이탈리아 항공 직배송으로 유명해진 국내에 진출한 로마 대표 맛집의 티라미수까지...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고 싶을 때, 마법 주문을 걸 듯 티라미수를 먹곤 했다. 마카롱에 밀리고, 에클레어에 치이고, 크로플, 크림 도넛에 떠밀려 이제는 한물간 유행이 된 티라미수. 일흔 넘어서 처음 티라미수를 맛본 엄마에겐 젊은이들에게 빛바랜 유행이 신세계였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 알뜰하게 티라미수를 만끽한 엄마. 입가에 묻은 카카오 파우더를 닦으라며 냅킨을 건넸다. 입가에 묻었는지도 모르게 맛있게 드셨나 보다 생각하니 다음에는 티라미수 전문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엄마 인생에 몇 번의 티라미수가 있을까? ’이 나이에 뭘 새로 하냐 ‘, ’ 귀찮다 ‘라는 말로 나의 제안을 종종 거절하는 엄마. 내일 죽을 사람처럼,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말할 때마다 받아칠 말이 생겼다. 무겁게 가라앉은 내 엉덩이를 끌어올릴 티라미수 같은 말이 생각났다.
"엄마가 일흔 넘어서 처음 맛본
티라미수가 그렇게 맛있었다며.
혹시 알아?
오늘 처음 해본 일이
눈 감기 전, 제일 잘한 일로 꼽을지?
모르는 일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