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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29. 2017

서울시내 모녀 여행

30여 년 전 모녀가 살던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다

                                                            

얼마 전, 햇빛이 따사로운 봄날.

시간이 나서 엄마와 창경궁 구경을 갔다.

 

창경궁을 가기 위해 집에서 버스를 탔고

버스는 막 혜화 로터리에 들어섰을 때였다.

엄마는 말했다.


“와 진짜 여기 오랜만이다”


그렇다.

약 30년 전, 우리 가족은 이 동네에서 살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혜화동 로터리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있는

성균관대학교 뒤의 산동네인 명륜동 고개에 살았다.


버스가 혜화동 로터리를 한 참 지났는데도

엄마의 눈은 그 동네를 떠나지 못했다.


그날, 창경궁 구경을 마치고 인사동에서 점심을 먹으며

다음번엔 옛날 살던 그 동네를 가 보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을 했던 날이 밝았다.

엄마는 오전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다 정리하고 나니

오후 2시가 넘었었다.

그런데 아빠의 저녁식사를 챙기려면 6시까지는 와야 하는 상황

왔다 갔다 이동시간이 총 2시간을 빼고 나니

엄마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3시간뿐이었다.


나간 김에 밥도 먹고 차도 마시려면 시간이 좀 빠듯하다 싶어

나는 좀 더 여유 있을 때 가는 건 어떨까 내심 생각했다.


“엄마 담에 좀 더 여유 있을 때 갈까?"


라고 물었는데 엄만 그냥 가자고 하셨다.

무척 가고 싶으셨나 보다.


지체 없이 버스틀 탔고

1시간 여 후 우린 혜화동 로터리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거리는 봄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그 거리를 걸을수록 모녀는 추억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혜화 초등학교를 목적지로 찍으면

우리가 살던 집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모바일 지도를 켜고 목적지를 향해 갔다.

생각보다 혜화 초등학교는 가까웠고

교문 앞에 선 엄마는 몹시 당황하셨다.

나 역시 당황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큰언니가 다니던 내 기억 속의 혜화 초등학교는 산동네 중턱에 있어서

운동장에 서면 종로 거리가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혜화 초등학교는 평지에 위치해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내용을 좀 찾아보니 초등학교는 2000년에 이전했다고 한다.

(혜화 초등학교가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후 그 자리에는 현재의 서울국제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그때부터 모녀의 기억 회로는 혼선이 오기 시작했다.

5살이었던 나 보다 지금의 내 나이인 엄마의 기억에 의지해

예전에 살던 집을 향해 골목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몇 해 전 무릎 수술을 한 엄마가

이렇게 빠르고 잰걸음으로 신이 나서 걷고 오르는 걸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조금 더 조금 더 높은 제대로 올라갔다.

물론 낮은 동네는 새로 지은 건물들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윗동네는 시간이 멈춘 듯 좁은 골목 사이로

여전히 작고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오래된 폰트의 간판들이 붙은 ‘콤퓨타’ 세탁소,

편의점의 세련됨 대신 채소와 과일을 가게 앞 평상 위에 진열한 슈퍼마켓

먼지가 쌓인 멈춘 시계들과 작은 카세트 라디오가 가득한 전파사

가게 안 보다 가게 밖에 자재들이 더 쌓인 철물점... 변함없었다.


21세기 서울 시내 한복판이라고 하기에는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쯤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 몇 바퀴를 돌고 돌아

겨우 우리가 살던 그 집 앞에 당도했다.


녹슨 철대문에 회색 시멘트 벽돌 담장이었던 집은

흰색 페인트칠을 한 담장과 말끔한 스테인리스 대문으로 단장을 했지만

안쪽은 여전했다.


소심한 모녀는 선뜻 대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문 밖에서 두리번거리며 추억을 곱씹었다.


지금의 내 나이였던 젊은 시절의 엄마.

딸린 아이는 넷이었고

남편은 돈을 버는 일 보다 화투패에 관심이 더 많았다.


하루 종일 거리에서 치이며 장삿일을 마치고

숨이 턱에 찰 만큼 많은 계단을 오르면 겨우 달동네 중턱의 셋방살이 집에 도착한다.


그저 그 시절 살았던 집을 보는 것만으로도

환갑을 넘긴 엄마는 30대로 돌아갔다.


"이 집은 변함이 없네~"

"이렇게 작은 집에서 여섯 식구가 어떻게 살았지?"

"주인집 아줌마가 널 참 예뻐했는데..."

"꼬맹이가 겁도 없이 잠도 안 자고 12시면 동네를 뒷짐 지고 돌아다녀

넌 “방범대원”이라는 별명이 붙었지..."

(난 유아기에도 야행성이었다)


나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시절의 이야기를

엄마는 마치 어제일 인 것처럼 신이 나서 주절주절 이야기하셨다.


엄마한테는 분명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을 텐데

추억이란 당의정을 입힌 그곳의 기억들은 엄마를 신나게 만들었다.


그곳은 힘들기만 기억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엄마가 있었고

그 엄마를 바라보는 제비 새끼 같은 4남매가 있었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을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일 거다.


지금은 남의 집이지만 30년 전 살았던 집 앞에서

모녀는 나란히 인증샷을 찍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지만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웃음이 번질 것 같다.


차가운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도토리며 알밤이며 겨울 양식을 채운 다람쥐처럼

가슴이 따뜻하고 든든해졌다.


그 후 집 뒤로 성곽길을 넘어 성북동으로 내려왔다.

그냥 가긴 아쉬워 <성북동 돼지갈비> 집에서 한상 먹고

나폴레옹제과점에서 빵 한 봉지를 사서 뜯어먹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더 든든했는지 모르겠다.


별거 아닌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네에 가보는 것도

대단한 여행지를 가는 것보다 오래 그리고 깊이 여운이 남았다.


어디든 떠나기 좋은 봄,

옛 동네로의 여행은 모녀에게 기분 좋은 추억을 하나 더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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