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 한정 만성 쿨병 환자의 깨달음
넌 남의 일엔 되게 쿨하다
잔잔한 소음 속에 술잔이 오가던 금요일 밤.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던진 이 한마디에 별생각 없이 들이키던 맥주가 목에 턱 하고 걸렸다. 팩트 폭격.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할 수 없었다. 목에 걸린 맥주만 겨우 넘기고 맥주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한동안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맥주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그러네?
남 문제의 해결책은 척척 내놓으면서
내 문제는 끌어안고 끙끙거리지?
남의 일 한정 쿨병 말기. 그게 나다. 타인들이 고민하는 문제의 해결책은 쉽게 보였다. 문제가 쉬워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는 간결하다. 차 떼고, 포 떼면 결국 핵심만 남는다. 불필요한 정보나 감정들은 빠지고, 최적의 선택을 위한 팩트만 남게 된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생각에서 출발해 심플한 판단을 하게 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갈 방법이 한눈에 들어왔다.
반면, 내 문제의 답은 늘 흐릿했다. 답을 찾기 위해 생각을 하다 보면 수많은 정보, 변수와 관계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고민에 고민이 더해져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나를 선택했을 때 따라오는 A부터 Z까지의 무수한 가능성들. 그것들을 재고 따지면서 최적의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했다. 덜 후회할 선택을 하기 가능성 없는 맨 아래의 답부터 하나씩 지워갔다. 하지만 돌아서면 털어낸 오답들이 이자가 붙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고민이 고민을 부르고, 걱정이 걱정을 낳았다. 최종 결론을 얻기까지 꽤 오랜 시간 제자리를 맴돌았다. 마치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모호하고 답답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나고, 그 열 때문에 머리는 늘 띵했다. 그럴 때면 소화기로 불을 끄듯, 두통약을 입안에 밀어 넣곤 했다.
내 코도 제대로 못 닦으면서
뭐 잘났다고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했을까?
내 코부터 잘 닦자.
근데 내 코, 어떻게 닦아야 하지?
내 문제의 해결책은 남의 머릿속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남의 입을 통해 내 문제의 답을 찾을 게 아니었다. 약을 먹을 게 아니라 물러서면 되는 거였다. 멀리도 아니고 그저 딱 한 발짝만. 남의 일처럼 거리를 두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쉽게 풀리는 거였다. 불필요한 사족은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버리고, 남에게 상담하듯 건네는 핵심 정보만으로 판단하면 됐다.
이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끌어안고 열 내는 대신 툭 던져 버리기로 했다. 남의 일처럼 바라볼 것이다. 물론 내 안에 있는 한 완벽한 남의 일이 될 순 없다. 하지만 의도적으로라도, 물리적으로라도 남의 일처럼 바라보기로 했다. 한 발짝 물러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분명 술술 풀릴 테니까.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오는 게 순리이자 이치. 그렇다면 '쿨'을 심으면 분명 '쿨'이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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