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라는 덫, 느낌표라는 닻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제주의 깊은 숲을 트래킹 하던 중이었다. 가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제외하면 나와 여행 메이트의 헐떡이는 숨소리뿐인 숲.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바스락,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렸다. 인적 드문 숲길에 우리 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순간 서늘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뭐지? 누구지?
날 선 경계심을 장착하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멀지 않은 곳에 까만 눈동자가 우릴 주시하고 있었다. 초록을 잃은 겨울 산에 어울리는 누르스름한 보호색을 잘 차려입은 노루 세 마리. 숲길의 시작점, 이곳에 사는 야생동물을 소개하는 안내판에서 확인한 숲의 주인들이다. 순간,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발을 들인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노루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걸음 걸음마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숲 속에서 노루를 만나다니 흔치 않은 일이네... 근데 노루는 왜 노루지? 이름이 왜 노루일까? 노루에 관한 물음표가 대낮의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즈음 세상 만물의 ‘어원’에 대한 책을 연달아 읽고 있었다. 그 책들의 영향일까? 노루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궁금했다. 걸음을 멈추고 스마트 폰을 켜 노루 이름의 어원을 검색했다.
노루 : 사슴과의 짐승. 중세어형은 '노로'이다.
'노루'는 '노랗다'의 어간형이 굳어진 말이다.
신기하지 않아? 노루의 노란빛 털 색깔에서 따온 이름이래. 호들갑을 떨며 일행에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지근한 반응이 돌아왔다. 노루라는 신세계(?)에 입성했다는 기쁨 대신, 해 떨어지기 전에 가던 길이나 가자는 재촉이 날아들었다. 갑자기 노루에 폭 빠져 한참 검색창을 뒤지고, 호들갑을 떠는 나를 보는 여행 메이트의 눈빛은 텅 비어있었다. 물음표 하나에 발목 잡혀 해가 짧은 숲 속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으니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한다.
이렇게 난 내 앞에 물음표가 던져지면 그냥 넘기지 못한다. 덕분에 습자지 같은 얇은 지식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몰라도 사는데 지장 없는 잡지식을 차곡차곡 쌓으며 희열을 느낀다.
문제는 그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뀐 후에야 발걸음을 옮기는 성향이라는 것.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나를 찾아오는 건 설렘도 아니고 기대도 아니다. 늘 ‘왜?‘라는 질문이 선수를 친다. 왜 해야 하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일을 섣불리 시작하지 않았다. 일을 시작했을 때의 장단점, 일의 끝에 내가 얻게 될 것은 무엇인가? 오만가지 시뮬레이션이 머릿속에서 작동된다. 손해와 이익. 두 글자를 마음속 저울 양 끝에 올려놓고 가늠해 본다. 조금이라도 이익 쪽에 기울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다. 결정키를 누른 후에는 가속도가 붙지만, 부팅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타입이다. 물음표가 쳐놓은 덫에 빠진 탓이다.
친구는 말한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후배는 말한다.
선배, 이제 생각 그만!
지인들은 말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해야 할까?
누군가는 신중하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답답하다고 했다. 실패자 혹은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웠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신중해야만 했다. 왜?라는 물음표가 지워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성향. 덕분에 ‘잡지식‘을 얻었다. 동시에 ‘고지식’도 얻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결정할 일이 많아진다. 꼬꼬마 시절보다 내 결정의 여파가 미칠 영역도 더 넓어진다. 한층 묵직해진 결정의 무게감이 내 발목을 꽉 잡는다. 물음표의 굽은 등을 매끈한 일직선의 느낌표로 바꾸기 위해 고민하다 금 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날 납득시키느라 공들인 시간 동안 많은 기회가 흘러갔다. 결정은 신중해야 하지만, 오래 고민한다고 꼭 좋은 결과가 오는 건 아니라는 경험이 몸에 쌓였다. 그래서 이제 마음속 저울에서 손익을 가늠하는 시간을 점점 줄여가고 있다. 지우기 무섭게 쌓여가는 스팸 메일처럼 물음표가 쌓이는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이 마법의 주문을 꺼낸다.
일단 해. 생각하지 말고 진행시켜.
모든 일에 ‘해보고 아니면 말자’라는 생각으로 좀 가볍게 접근하려고 노력 중이다. 좀 돌아가고, 더디게 가더라도 꾸준히 가면 언젠가 목표점에 닿는다는 경험이 가져온 변화다.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말재주, 닿는 순간 뭐든 황금으로 만드는 손재주만 재능인 줄 알았다. 그런데 ’꾸준함’도 그에 못지않은 재주라는 걸 이제는 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 꾸준히 쌓아가는 시간 속에는 작은 느낌표가 성실하게 모인다. 이리저리 망망대해를 떠돌던 배가 항구에 닿으면 내리는 묵직한 닻처럼 그 작은 느낌표들은 불안에 떠는 나를 단단히 잡아 준다. 흔들리지 않게, 떠내려가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