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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22. 2021

철이 없었죠? 곱창전골을 먹겠다고 등산을 했다는 자체가

당고개역 <우리집 곱창> 방문기


몇 해 전, 이맘때였다. 갑갑한 마음을 달래 보자며 지인과 등산을 계획했다. 서울 안에서 등린이(등산+어린이)가 갈만한 야트막한 산을 찾았다. 몇 번의 클릭 끝에 수락산이 물망에 올랐다. 늘 먹는 일에 진심인 우리는 하산 지점에 있는 맛집부터 뒤졌다. 별 기대도 없이, 서울 끄트머리에 있는 오래된 곱창집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됐다. 그 후 봄이면 늘 그곳이 생각났다.      


4호선의 끝, 당고개역에 있는 허름한 곱창집. 손님들의 평균 연령은 아마 50대는 훌쩍 넘을 동네 음식점. 발목까지 찰랑하게 국물이 차 있고, 새빨간 양념으로 메이크업을 한 돼지 곱창 위로 산더미만큼 당면을 쌓아주는 집. 올해 우리는 다시 그곳의 곱창전골을 먹기 위해 등산화의 끈을 야무지게 묶고 거사(?)를 시작했다. 5분 오르고 3분 쉬는 우리만의 속도로 천천히 수락산을 음미했다. 이제 막 연둣빛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나무들이 들어선 수락산. 바람도 따뜻했고, 미세먼지도 심하지 않았다. 청량 필터라도 끼운 듯한 분위기에 금새 어두운 기분들이 사라졌다. 몇 걸음 오르면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간간이 불어주는 바람, 다리가 아플 위치마다 친절하게 자리하고 있는 벤치 등이 있어 떡이 되지 않고 등산을 마칠 수 있었다.      


그날의 모든 일정은 곱창집의 컨디션에 맞췄다. 한마디로 등산은 곱창전골을 위해 거들뿐! 등산은 그저 곱창전골을 위해 철저히 이용’ 당‘했다 그 곱창집이 휴무일이 아닌지부터 체크했고,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걸 기준 삼아 출발 시각도 정했다. 수락산 루트 중 가장 완만한 코스를 골라 ’적당한 허기’부터 장전하기로 했다. 곱창전골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3시간쯤 산을 타고 내려오니 <곱창전골>  맛있게 먹을 만큼 배고픔이 밀려왔다.   만에 다시  당고개역은 여전히 ‘여기가 서울이 맞나?’싶게 정겨운 풍경이 가득했다. 고층 빌딩이나 세련된 건물들은 없다. 허름하고 야트막한 회색빛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크게 변한  없어 보였다. 하지만 곱창집으로 가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니 이곳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재개발 때문에 생긴 주민 사이 갈등의 흔적이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다시    후에 오면 이곳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됐다. 어쩌면  오래된 곱창집에서 먹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오후 4시. 아직 해는 한창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영업하는지 안 하는지 모를 분위기는 여전했다. 어수선한 밖의 분위기와 달리 내부에는 이미 손님이 2/3는 차 있다. 오픈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착한 어린이들처럼 곱창전골 냄비가 자기 테이블로 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수락산에서 조금만 더 게으름을 부렸다면 웨이팅에 걸렸을지 모른다. 꽤 피곤해 보이던 할머니 사장님은 보이지 않고, 따님으로 추정되는 젊은 사장님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새 손님이 왔다는 느낌만으로도 환영 인사도 전에 “체온 체크하시고, 출입 명부부터 작성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 시국스러운 인사를 보니 역병이 돌아도 이에 굴하지 않고 곱창전골에 몰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느껴졌다.      


자리를 잡기도 전에 주문부터 했다. 곱창전골 외에도  가지 메뉴가 있지만 메뉴판을  필요가 없다. 우린 이곳의 <곱창전골> 위해 오늘 하루를 오롯이 쏟았으니까. <곱창전골> 먹겠다고 산을 탔으니까. 잠시 , 우리는 드디어 곱창전골의 실물을 영접했다.  만남 이후 봄만 되면 떠오르던 음식.     뿐이던 만남을 추억하고 곱씹게 만들던 마성의  녀석. 곱창전골을 먹겠다고 서울 서쪽 끝에서 동북쪽까지 가로질러 오게 만드는 존재. 두툼한 무쇠솥 위에 깔끔하게 손질된 돼지 곱창이 푸짐하게 깔린다.  위로 당면과 깻잎이 거짓말  보태 63 빌딩만큼 높게 쌓여 있고 새빨간 특제 양념으로 화룡점정. 불을 켜고 전골이 끓기 시작하니 고소하고도 쿰쿰한 냄새가  안에 가득 찼다. 하얗던 당면이 투명해지면  익었다는 신호. 먼저 경건하게 차가운 맥주로 입을 헹군  목으로 넘긴다. 고대하던 곱창전골을 맞이하는 예의다. 미끈한 당면을 젓가락으로 조심조심 집어 앞접시로 데려온다. 잠시 식히며 곱창을 골라 당면 위에 올린    가득 넣는다. 당면과 곱창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쫄깃한 식감, 곱창에서 배어 나오는 매콤 달달한 감칠맛, 마지막으로 스치는 깻잎 향까지...


그래 이거지!     

하루의 피로 아니 몇 년 간 쌓아온 그리움이 스르르 녹는 맛이다. 국물을 조리며 함께 산을 탄 등산 메이트와 얘기했다. 차 타고 슝 여기 왔다면 이렇게 맛이 있을까? 산에 올라갔다 오지 않으면 이 맛이 안 났을 거라고 우리만의 결론을 내렸다. 시답잖은 수다를 떠는 사이 발목까지 찰랑이던 국물은 복숭아 뼈 아래까지 졸아들었다. 이때가 바로 ‘깍두기’를 넣을 타이밍. 손톱보다 작게 자른 이 집의 시그니처, 깍두기를 국물째 넣어야 비로소 완벽한 곱창전골이 완성된다. 깍두기가 들어간 곱창전골은 한층 맛이 진해지고, 씹는 맛까지 배가 된다. 보글보글 맛있게 끓는 곱창전골에 맥주 몇 병을 들이켜니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잊지 않고 한국인의 디저트,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왔다. 배가 터질 거 같았다. 하지만 여기 오기 전 등산을 했다는 얄팍한 핑계가 과식의 죄책감을 지워줬다. 꽤 괜찮은 하루가 그렇게 마무리됐다.     

 

당고개까지 곱창전골만 먹으러 올 일이 있을까? 등산이 없다면 아마 곱창전골도 없을 거다. 곱창집을 나오며 다음번에는 수락산이 아닌 불암산에서 출발해야겠다 다짐했다. 출발지는 달라도 마무리는 늘 이 곱창집일 거다. 그게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다시 올 때까지 이 작은 곱창전골집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길 바란다.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에게 <곱창전골>이 전하는 뜨끈하고 든든한 위로가 변함없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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