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개역 <우리집 곱창> 방문기
몇 해 전, 이맘때였다. 갑갑한 마음을 달래 보자며 지인과 등산을 계획했다. 서울 안에서 등린이(등산+어린이)가 갈만한 야트막한 산을 찾았다. 몇 번의 클릭 끝에 수락산이 물망에 올랐다. 늘 먹는 일에 진심인 우리는 하산 지점에 있는 맛집부터 뒤졌다. 별 기대도 없이, 서울 끄트머리에 있는 오래된 곱창집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됐다. 그 후 봄이면 늘 그곳이 생각났다.
4호선의 끝, 당고개역에 있는 허름한 곱창집. 손님들의 평균 연령은 아마 50대는 훌쩍 넘을 동네 음식점. 발목까지 찰랑하게 국물이 차 있고, 새빨간 양념으로 메이크업을 한 돼지 곱창 위로 산더미만큼 당면을 쌓아주는 집. 올해 우리는 다시 그곳의 곱창전골을 먹기 위해 등산화의 끈을 야무지게 묶고 거사(?)를 시작했다. 5분 오르고 3분 쉬는 우리만의 속도로 천천히 수락산을 음미했다. 이제 막 연둣빛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나무들이 들어선 수락산. 바람도 따뜻했고, 미세먼지도 심하지 않았다. 청량 필터라도 끼운 듯한 분위기에 금새 어두운 기분들이 사라졌다. 몇 걸음 오르면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간간이 불어주는 바람, 다리가 아플 위치마다 친절하게 자리하고 있는 벤치 등이 있어 떡이 되지 않고 등산을 마칠 수 있었다.
그날의 모든 일정은 곱창집의 컨디션에 맞췄다. 한마디로 등산은 곱창전골을 위해 거들뿐! 등산은 그저 곱창전골을 위해 철저히 이용’ 당‘했다 그 곱창집이 휴무일이 아닌지부터 체크했고,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걸 기준 삼아 출발 시각도 정했다. 수락산 루트 중 가장 완만한 코스를 골라 ’적당한 허기’부터 장전하기로 했다. 곱창전골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3시간쯤 산을 타고 내려오니 <곱창전골>을 딱 맛있게 먹을 만큼 배고픔이 밀려왔다. 몇 년 만에 다시 온 당고개역은 여전히 ‘여기가 서울이 맞나?’싶게 정겨운 풍경이 가득했다. 고층 빌딩이나 세련된 건물들은 없다. 허름하고 야트막한 회색빛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크게 변한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곱창집으로 가기 위해 안으로 좀 더 들어가니 이곳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재개발 때문에 생긴 주민 사이 갈등의 흔적이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다시 또 몇 년 후에 오면 이곳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됐다. 어쩌면 이 오래된 곱창집에서 먹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오후 4시. 아직 해는 한창이지만 바깥에서 보면 영업하는지 안 하는지 모를 분위기는 여전했다. 어수선한 밖의 분위기와 달리 내부에는 이미 손님이 2/3는 차 있다. 오픈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착한 어린이들처럼 곱창전골 냄비가 자기 테이블로 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수락산에서 조금만 더 게으름을 부렸다면 웨이팅에 걸렸을지 모른다. 꽤 피곤해 보이던 할머니 사장님은 보이지 않고, 따님으로 추정되는 젊은 사장님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새 손님이 왔다는 느낌만으로도 환영 인사도 전에 “체온 체크하시고, 출입 명부부터 작성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 시국스러운 인사를 보니 역병이 돌아도 이에 굴하지 않고 곱창전골에 몰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느껴졌다.
자리를 잡기도 전에 주문부터 했다. 곱창전골 외에도 몇 가지 메뉴가 있지만 메뉴판을 볼 필요가 없다. 우린 이곳의 <곱창전골>을 위해 오늘 하루를 오롯이 쏟았으니까. <곱창전골>을 먹겠다고 산을 탔으니까. 잠시 후, 우리는 드디어 곱창전골의 실물을 영접했다. 첫 만남 이후 봄만 되면 떠오르던 음식. 그 단 한 번 뿐이던 만남을 추억하고 곱씹게 만들던 마성의 그 녀석. 곱창전골을 먹겠다고 서울 서쪽 끝에서 동북쪽까지 가로질러 오게 만드는 존재. 두툼한 무쇠솥 위에 깔끔하게 손질된 돼지 곱창이 푸짐하게 깔린다. 그 위로 당면과 깻잎이 거짓말 좀 보태 63 빌딩만큼 높게 쌓여 있고 새빨간 특제 양념으로 화룡점정. 불을 켜고 전골이 끓기 시작하니 고소하고도 쿰쿰한 냄새가 코 안에 가득 찼다. 하얗던 당면이 투명해지면 다 익었다는 신호. 먼저 경건하게 차가운 맥주로 입을 헹군 후 목으로 넘긴다. 고대하던 곱창전골을 맞이하는 예의다. 미끈한 당면을 젓가락으로 조심조심 집어 앞접시로 데려온다. 잠시 식히며 곱창을 골라 당면 위에 올린 후 한 입 가득 넣는다. 당면과 곱창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쫄깃한 식감, 곱창에서 배어 나오는 매콤 달달한 감칠맛, 마지막으로 스치는 깻잎 향까지...
그래 이거지!
하루의 피로 아니 몇 년 간 쌓아온 그리움이 스르르 녹는 맛이다. 국물을 조리며 함께 산을 탄 등산 메이트와 얘기했다. 차 타고 슝 여기 왔다면 이렇게 맛이 있을까? 산에 올라갔다 오지 않으면 이 맛이 안 났을 거라고 우리만의 결론을 내렸다. 시답잖은 수다를 떠는 사이 발목까지 찰랑이던 국물은 복숭아 뼈 아래까지 졸아들었다. 이때가 바로 ‘깍두기’를 넣을 타이밍. 손톱보다 작게 자른 이 집의 시그니처, 깍두기를 국물째 넣어야 비로소 완벽한 곱창전골이 완성된다. 깍두기가 들어간 곱창전골은 한층 맛이 진해지고, 씹는 맛까지 배가 된다. 보글보글 맛있게 끓는 곱창전골에 맥주 몇 병을 들이켜니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잊지 않고 한국인의 디저트,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왔다. 배가 터질 거 같았다. 하지만 여기 오기 전 등산을 했다는 얄팍한 핑계가 과식의 죄책감을 지워줬다. 꽤 괜찮은 하루가 그렇게 마무리됐다.
당고개까지 곱창전골만 먹으러 올 일이 있을까? 등산이 없다면 아마 곱창전골도 없을 거다. 곱창집을 나오며 다음번에는 수락산이 아닌 불암산에서 출발해야겠다 다짐했다. 출발지는 달라도 마무리는 늘 이 곱창집일 거다. 그게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다시 올 때까지 이 작은 곱창전골집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길 바란다.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에게 <곱창전골>이 전하는 뜨끈하고 든든한 위로가 변함없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