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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n 30. 2021

화를 잘 내는 방법

세상에 없는 답을 찾는 어리석음


한동안 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문제는 왜 그 우울함이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시작이 뭔지 알 수 없기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끝도 없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했다. 특별한 문제는 없었고, 일상은 일상대로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원래 하던 일, 새롭게 시작되는 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눈 뜨면 일어나 일을 하고, 운동하고,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대 평온하지 않았다. 뭔가 잘 먹지 못했고, 잠도 깊이 자지 못했다. 전화벨 소리나 카톡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조마조마한 날들이었다. 우울한 기분에 지고 싶지 않아서 평소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몸이 고단하면 잠을 잘 자고, 집 나간 입맛도 돌아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나를 우울에서 꺼내 주지 못했다. 나의 시도들이 수포가 되고 있다 느낄수록 맥이 빠졌다.      


정상 컨디션이 아니어서인지 평소라면 ‘이상하네!’ 하고 넘어갈 사소한 일에 화가 났다. 어깨를 밀치며 먼저 지하철 안으로 튀어 들어가는 사람의 뒤통수에 레이저 눈빛을 쐈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21세기 인간 용(龍)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인도(人道)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꽁무니에 소심한 하이킥을 날렸다. 걸쭉한 침을 내뱉는 사람들 향해 들숨에 치질, 날숨에 변비가 세트로 강림하길 빌었다.  


감정이 앞설까 봐 입을 닫았다. 말로 내뱉어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웠다. 사람들을 피하고,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철창 안에 갇혀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열심히 달리는데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있었다. 답답함을 못 견디고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후배에게 물었다.


"화를 내고 싶은데 어떻게 내야 하는지 모르겠어.

화를 잘 내는 방법이 있어?"

   

뭔 말도 안 되는 걸 묻느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의 후배가 말했다.     


"화를 잘 내는 방법이 있어요?

화는 그냥 내는 거지.

왜 상대방이 상처 받을 거까지 걱정해요?

그래서 선배가 괴로운 거야.

화는 그냥 쏟아내요!

선배만 생각하라고!"


마음속 화가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을 때의 그 차가운 공기. 갈 곳 잃은 눈동자. 날이 선 말들로 상대를 베는 그 모습이 싫고 불편했다. 거북한 그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 애초에 화가 쏟아지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피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방패 삼아 화라는 ’ 파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멀찍이 떨어져서. 시간은 약이 분명했지만, 시간이 쌓여 잊는 거지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었다. 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뒤숭숭했다. 핀트가 나가면 나든 상대방이든 언제든 폭탄의 핀을 뽑아 버릴 거 같았으니까. 언제 화가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변검술 전문 배우처럼 상황에 맞게 표정과 기분을 확확 바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난 얼굴에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불안한 마음, 불편한 마음은 얼굴만 봐도 티가 난다. 내가 더 영악했다면 어땠을까? 냉냉한 표정의 여파를 알지만, 눈을 질끈 감고 입도 꾹 닫는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명하게 화를 낸다거나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분노를 표현하는 건 어렵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런데 나는 성인군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 중에서도 쉽게 마음이 부서지고, 그 파편으로 생채기 잘 생기는 사람이다. 그러니 화라는 감정이 올라오는 건 당연하고, 뒷일까지 생각하면서 화를 ’잘‘내는 방법 따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화가 나면 나는 대로 감정의 온도가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길 지켜봐야 한다. 그 불을 꺼보겠다고 섣불리 물을 뿌리거나, 소화기를 들이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화를 누르려고 애쓸수록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 나간다.      


여전히 거대한 불꽃같은 화를 내지는 못한다. 그저 성냥개비 불만큼, 케이크의 촛불만큼 작고 귀여운 사이즈에서 서서히 불꽃의 크기를 키워가고 있다. 달팽이의 속도로, 거북이의 속도로. 혼자 억울해하지 않고,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피해자 코스프레하지 않기 위해 잔잔하게 화를 낸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그게 상대방에게 가 닿건 말건, 내 감정을 솔직히 내뱉는다. 현명하게 화를 내기 같이 세상에 없는 답을 찾는 어리석은 짓은 더는 안 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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