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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l 05. 2021

무선의 역습

자유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물욕은 없다. 다만 내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을 뿐. 쇼핑을 자주 하지 않기에 하나를 사더라도 오래 쓸 수 있는 걸 사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다. 지난해 ’올해의 잘산템’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무선 이어폰>이다. 무선 이어폰의 신세계를 접한 지인들의 간증에 힘입어 뒤늦게 카드를 긁었다. 유선 이어폰이 저세상으로 간 그 시점에 맞춰.       


인생의 1/3이 넘는 시간을 길바닥에 뿌려야 하는 숙명의 소유자, 경기도민으로 산지 NN년. 왕복 3시간 가까운 시간 대중교통 안에서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런 나에게 이어폰은 생명줄이다. 강한 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지하철 계의 할렘, 1호선. 세상의 모든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는 광역버스. 이어폰이 없다면 그곳이 바로 생지옥이다.      


닳고 닳은 쇳소리를 내며 포교 활동을 하는 사람, 날카로운 눈빛으로 구걸을 하는 사람, 먹고사니즘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내뿜는 취객, 전세라도 낸 듯 떠드는 학생 무리까지...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존재들을 차단하는 나만의 ‘블라인드’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으면 현실 지옥 한쪽에 한 평짜리 방공호를 차지한 기분이다. 출퇴근 길에도, 산책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잠자기 전에도 늘 무선 이어폰이 귀에 꽂혀 있다. 유선 이어폰과 무선 이어폰. 차이는 줄의 유무뿐. 하지만 줄이 없는 자유로움은 충전하는 번거로움을 압도한다.      


‘무선의 달콤함‘을 맛을 본 건 이어폰이 처음은 아니다. 휴대전화, 청소기, 마우스를 비롯해 많은 이미 난 일상 속에서 자주 무선 제품을 사용한다. 지금 초등학생인 조카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애초에 이 물건들은 모두 줄이 있었다. 줄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내가 느끼는 만족감은 기대 이상이다. 하지만 무선의 매력에 빠질수록 잊게 된다. 무선의 자유를 느끼기 위해서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걸.      


며칠 전부터 버벅거리던 무선 마우스가 조금 전 사망했다. 배꼽 쪽 불빛이 약해지더니 숨을 거뒀다. 정확한 사인은 예상대로 배터리 방전. 조만간 사망하겠다 싶었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다. 오늘이어서는 안 됐다. 시간에 쫓기며 온종일 문서와 씨름을 해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필 이럴 때 말썽이다. 크게 호흡 한 번 하고 갑자기 들이친 짜증을 날려 보냈다. 곧장 근처 편의점에서 배터리를 공수해 왔다.      


30년 차 심장 전문의의 자세로 조심조심 녀석의 가슴을 열고 닳아 버린 배터리를 꺼냈다. 그 자리에 새 배터리를 채워 넣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흐릿했던 불빛이 선명해졌고, 신호가 약해 방황하던 마우스 커서에 생기가 돌았다. 배터리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성능의 무선 제품이라도 쓸모없는 기계 덩어리에 불과하다. 모든 무선 기기는 제때 충전하고, 배터리를 갈아 줘야 제대로 작동한다.      


자유에 취해 살다 보면 그게 마르지 않는 샘인 줄 착각한다.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 내 배터리의 용량이 얼마인지, 내가 작동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뭐든 영원한 것도 없고 언젠가 끝이 있고 바닥은 나게 마련이다. 단기간에 승부를 볼 게 아니라면, 어차피 길게 갈 거라면 중간중간 내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가지고 저 먼 목표에 닿으려면 언제 쉬고, 다시 충전해야 하는지. 한정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현명함이 필수다.      


나를 돌보는 일에 소홀했다. 남들이 이만큼 하니까 나도 그만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마다 재능이나 체력을 담은 바구니의 크기는 각기 다르다. 애초에 사이즈가 다른 걸 모르고 세상이 세운 기준을 채우려 나를 채찍질했다. 삶의 행복도를 높이고 싶다면 열 일 제치고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내 그릇의 크기, 내 성향의 재질을 파악하기. 여러 사람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는 것으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있다. 반면 나는 혼자, 조용히, 느긋하게 ’내 시간‘을 보내야 에너지가 채워지는 사람이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잔잔한 시간이 지나면 에너지는 자동충전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청량함과 카페인을 동시에 채운다. 불멍, 물멍, 구름멍, 나무 그늘 아래 멍 등 다양한 종류의 명상이 아닌, ’멍상‘을 하면 내 몸과 마음은 고속 충전된다. 배터리를 교체 후 할 일 제대로 하는 자유로운 무선 마우스처럼 살고 싶다면, 나라는 인간의 배터리 성능 상태를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기대지 않고 살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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