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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l 07. 2021

소방차도 차는 차니까

깨워줘 꺼내줘 구해줘


정수리를 뚫을 듯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을 피해 어디든 실내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목표지점은 아직도 걸어서 10분은 더 가야 했다. 빨리 이 폭염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종종거리며 걷던 그때 였다. 저 멀리서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소방관들이 보였다. 뭐지? 사고? 아님 이 무더위에 불이라도 난 건가? 더운데 고생이 많으시네... 어? 근데 탄내는 안 나는데... 뭘까? 의문을 품은 찰나, 두 소방관의 수신호 안내를 받은 소방차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후진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덩치 큰 소방차가 조심조심 도로로 엉덩이를 디미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긴급 상황이 종료된 걸까? 다행이다 싶어 슬쩍 소방차가 나오던 골목을 확인했다. 그런데 물이 흥건한 그곳엔 화마의 흔적 없이 멀쩡했다.      


소방차가 왜 거기서 나와?      

그곳은 세차장이었다. 육덕진 소방차는 개운하게 세차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한여름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며 웃는 얼굴을 보니 제법 신나는 목욕을 했나 보다. 소방차와 세차장. 뭔가 조합이 어색했다. 특수차량이라도 차가 세차장에서 세차를 하는 건 당연한 일. 근데 그 차종이 소방차라는 게 한없이 낯설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거대한 캐릭터 인형들의 휴식 시간을 훔쳐본 기분이랄까? 어린이들과 신나게 놀다가, 건물 뒤 켠에서 인형 탈을 머리 위로 올리고 맨 얼굴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느낌이었다. 사실, 소방차도 차니까 세차장을 출입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근데 왜 난 한 번도 세차장에 있는 소방차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을까?     


세상에는 내가 보는 부분보다 못 보는 부분이 훨씬 크다.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그런데도 종종 어리석은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고 내가 아는 게 정답이라고 믿는다. 섣부르게도.      

얼마 전에도 아차! 싶은 순간이 있었다.


카페에서 마감에 쫓겨 거북목 한 번 펴지 못하고 몇 시간째 일하는 중이었다. 100m 달리기를 하듯 숨 가쁘게 달려 가까스로 마감 시간에 맞춰 파일을 넘겼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돌처럼 굳은 딱딱한 승모근을 이리저리 늘이며 스트레칭을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내 눈에 그분이 들어왔다. 태블릿으로는 유튜브를 보며 스마트폰 맞고를 치고 있는 옆 사람. 3시간 전, 내가 처음 이 자리에 앉을 때도 그 모습이었다. 3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혹시 로또 당첨자일까? 아니면 건물주? 평일 낮에 느긋하게 카페에서 고스톱과 유튜브 시청으로 망중한을 즐기다니... 부럽다. 먹고사니즘의 고단함에 지쳐 있던 일개미는 절친들의 단톡방에 현장 상황을 중계하며 푸념을 늘어놨다. 그중 한 친구가 생각지도 못한 추측을 던졌다.      


"마음의 불안을 잊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맞고 중독이었던 때가 있던 입장으로 ㅋㅋㅋㅋㅋ"     


경험에서 우러난 따끔한 바늘 같은 시선. 아... 고스톱으로 마음의 불안을 잊을 수 있구나. 이래서 경험을 훔쳐갈 수 없는 재산이라고 하나보다. 경험하는 만큼 사람의 시야는 넓어진다. 할 수만 있다면 생각 없이 내뱉었던 푸념들을 모조리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싶었다. 카톡이니 메시지 삭제라도 하고 싶지만, 그 방의 모두가 내 넋두리를 다 읽었다. 화살은 내 손을 떠났고,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내가 툭 내뱉은 신세타령이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거였다. 어쩌면 내 한마디에 애써 잊고 지냈던 시간을 강제로 꺼내게 됐을 수도 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세상 만물에 통달한 사람은 될 수 없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살면 직·간접 경험을 통해 닫혀 있는 생각의 문을 열 수 있다. 활짝 귀를 열어 두고 살면 무지(無知)에 갇혀 있는 나를 꺼낼 수 있다. 소방차의 느긋한 휴식 시간을 우연히 목격한 후 강철 영웅 같던 소방차도 관리와 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자동차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친구의 경험에서 우러난 한 마디로 고스톱으로 마음의 불안을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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