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받는 선물
종종 이상한데 꽂히는 편이다. 남들은 '이게 왜 재미있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묘한 희열을 느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그저 ’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중 하나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따라오는 ’ 남모르는 기쁨‘이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펼쳤을 때, 예상치 못한 ’ 선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책이 주는 정보나 위안, 메시지와 별개로 손에 쥐어지는 선물이 있다. 보통은 대출 확인증이나 영수증. 아니면 전시회 입장권, 쿠폰이나 명함, 때로는 출판사나 서점에서 나온 판촉용 책갈피가 나오기도 한다. 도서관 책 속에 숨은 선물이 바로 이거다. 그래서 보물찾기 하는 아이처럼, 도서관 책을 받아 들면 제일 먼저 후루룩 넘겨 책 안에 있는 선물부터 찾는다. 10번에 8번은 꽝이지만, 2번의 선물을 기대하며 들뜬 마음으로 책을 펼쳐 본다.
나보다 먼저 ‘그 책’을 빌린 선배들이 남긴 선물 안에서 그들의 취향을 상상해 본다. 대출 확인증에서는 함께 빌린 책 리스트를 훔쳐보며 다음번 내가 빌릴 책 리스트를 채우기도 한다. 철 지난 영수증 안에서는 선배님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나 식성을 알게 된다. 커피 취향을 파악하기도 하고, 얼굴 모를 그분의 냉장고 속 사정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잊어버려도 아쉬움이 없을 판촉용 책갈피와 만날 때는 ‘책갈피의 기분‘을 헤아려 본다. 책갈피는 알았을까? 이렇게 빨리 이별이 올 줄.
스탬프가 찍힌 커피 쿠폰을 발견하면 책 잘 읽고 있다는 의미의 칭찬 스티커 받은 어린이 상태가 된다. 앞으로 이 책 잘 읽으라고 용돈이라도 받은 기분이다. 찍힌 도장의 개수가 반 이상 되면 카페 위치를 검색해 본다. 대부분은 내 활동반경 안에는 없는 곳이다. 성실하게 도장을 채우면 커피 한잔이 될 기회를 잃어버린 쿠폰 주인은 이 쿠폰의 존재를 기억이나 할까?
책 속에서 캔 '기억에 남는 문장'을 빼곡하게 적어둔 포스트잇을 만날 때도 있었다. 필체를 보면서 그 메모를 쓴 사람의 성격을 상상해 본다. ’ㄹ‘자를 휘날리듯 쓰는 걸 보니 성격이 급하겠구나. ’ㅁ’ 자를 네 귀퉁이의 각도를 칼같이 맞춘 걸 보니 반듯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겠구나. 이런 식이다. 필체뿐만 아니라 발췌한 문장들을 눈으로 읽으며 내 생각과 닿는 부분이 있는지, 아닌지도 생각해 본다. 문장을 품은 포스트잇은 책을 읽기 전에는 예고편이 된다. 책을 읽은 후에는 내가 마음속에 밑줄 그은 문장과 일치하는지 체크해 본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전혀 다른 부분에 꽂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의 책이라도 읽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이렇게 각기 다른 곳에 와닿는다.
언젠가 유치원생쯤 되는 아이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책 속에 꽂혀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와 그림이 섞인 편지였다. 엄마와 자신이 나란히 손잡고 있는 그림 아래에 색연필로 힘주어 쓴 <엄마 고맙습니다. 사랑해요.>라는 메시지가 전부였다. 단출한 내용이었지만, 가슴에 꽤 오래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읽은 책은 부서진 마음에 관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편지를 받는 엄마도 마음 어딘가 금이 가고 조각나는 중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엄마의 그 부서진 마음이 ’ 조각 모음‘ 됐을까?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 증명사진‘이었다. 자신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인지? 이름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지만, 도서관 근처에 사는 동네 주민(또는 그의 지인)이라고만 추측할 뿐이다. 취업준비생인 듯 몸에 붙지 않는 어색한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청년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정확한 책 제목은 기억에 없지만, 취업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될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진 속 청년의 얼굴이 그래서 짠하게 느껴졌다. 청년은 지금쯤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까? 영수증이나 대출 확인증이라면 보통 쓰레기통으로 직행이다. 하지만 그 사진은 그냥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가지고 있기도 애매했다. 책을 반납할 때 증명사진이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끼워 반납했다. 그 증명사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여전히 책을 비행기 삼아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을까?
나도 한때는 영수증이며 명함이며 포스트잇이며 손에 잡히는 대로 책갈피로 사용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속에서 혼자만의 보물 찾기를 하면서 그 습관이 바뀌었다. 나 같은 ’ 보물 헌터‘에게는 즐거움이지만, 주인은 다음 책으로 떠나고 혼자 남은 얇고 가벼운 위의 책갈피(혹은 각종 대용품)에게는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책을 반납기에 넣기 전, 무조건 후루룩 넘겨 남긴 게 없나 확인한다. 얇은 책갈피 대신 친구에게 선물 받은 집게 모양의 두툼한 북 스토퍼를 애용한다. 얇고 가벼운 책갈피를 책에 끼워 놨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물욕은 그다지 없지만 내 물건에 대한 애착은 있는 성향인 내게는 그게 맞았다. 잃어버린 후 뒤늦게 후회하기보다, 가지고 있는 걸 잘 간수하라고. 도서관 책 속 ’ 보물‘들이 남긴 메시지를 일상 속에서 곱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