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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29. 2021

우즉흥, 좌경솔을 향해

무계획의 쓸모


이래도 되는 걸까?


선명하지 않은 목적지로 가는 내내 불안했다. 이렇게 준비를 안 하고도 제대로 된 여행이 될까? 걱정을 가득 안고 도착한 조용한 바닷가. 바다를 슥 한번 둘러보며 코에 바닷바람을 넣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숙소부터 잡았다. 후기나 평점이 아닌 그저 간판이 깔끔한 곳에 택했다. 간판의 컨디션은 주인의 성향을 닮게 마련이다. 업소의 얼굴인 간판을 깨끗이 관리하는 곳은 대부분 그 안도 깔끔했다. 예감은 적중했다.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객실의 침대 위를 뒹굴뒹굴하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니 허기가 몰려왔다. 휴대전화와 지갑만 챙긴 후 운동화를 직직 끌고 숙소를 나섰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눈에 보이는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간판이 단정한 식당에서 라면을 먹었다. 이름난 맛집의 음식도, 먹고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특산물 요리도 아닌 그냥 후루룩 끓인 라면이 다였다. 계획하지 않으니 계획이 망가질 일이 없었다. 내키는 대로 한 여행, 그거면 충분했다. 아니 기대 자체가 낮으니 만족감은 수직 상승하는 일만 남았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남들도 다 나만큼은 준비하고 공을 들이는 줄 알았다. 여행만 해도 그렇다. 시간과 돈을 쪼개 가는 어렵게 가는 여행이니 어느 하나 손해 보고 싶지 않았다. 낯선 곳으로 떠날 때, 숙소와 이동 수단은 기본. 일자별로 가야 할 곳을 치밀하게 정한다. 유명하다는 맛집을 줄을 서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시간대부터 갑자기 비가 오면 갈 만한 곳까지... 처음 계획했던 곳이 문을 닫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가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플랜 B, 플랜 C까지 알뜰하게 준비했다. 이렇게 준비하니 계획한 게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플랜 A가 망가지면 대체할 B를 준비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하지만 B에서 해결되지 않는 상황도 있었다. 그러니 C, D, E까지 대비책의 대비책은 끊임없이 늘어났다.    

  

여러 성향의 사람들과 여행을 다니면서 알게 됐다.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준비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 내가 과하게 걱정하고 준비하고 실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안과 잔걱정을 안고 사는 내게 돌발 상황의 여파는 실제 크기보다 더 거대하게 다가온다. 돌발 상황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듯, 돌발 상황이 생기는 걸 막을 힘은 내게 없다. 하지만 대처할 방법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철저히 준비하고, 대안을 늘 품고 살았다.    

  

준비를 위해서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걸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자료를 뒤지고, 내게 필요한 걸 고르는 재미에 빠져 있다 보면 시간은 한없이 흐른다. 그 시간 속에서 의도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는 기대가 스멀스멀 차오른다. 그게 모이면 애드벌룬처럼 거대해진다. 막상 현실이 되었을 때, 머릿속 상상 이상이었던 경우는 드물다. 그렇게 기대했는데 겨우 이거라고? 라며 실망하는 슬픈 엔딩이 대부분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 놓고 말이다. 적당한 기대는 원동력이 되지만, 과한 기대는 독이 된다.     


’ 계획‘ 또는 ’ 준비‘라는 이름으로 나를 학대하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덜 실망하기 위해 덜 기대하기로 했다. 촘촘하고 치밀한 계획 따위 던져 버리고 우즉흥, 좌경솔하게 살아가려고 노력 중이다. 매번 계획하지만,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게 인생이니까. 훌쩍 떠난 작은 바닷가에서 얻은 조용한 위로가 더 오래 기억되듯.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불쑥 건넨 꽃다발 하나에 더 기쁘듯. 예고편이나 리뷰를 미리 읽지 않고 본 영화가 인생 영화가 될 확률이 높듯.     


지독한 계획 덕후로 살았기에 하루아침에 굳어버린 성향을 바꾸기란 어렵다. 조금씩, 천천히 나무늘보의 속도로 변화를 주고 있다. 우즉흥, 좌경솔한 삶을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단순하다. 마음의 눈을 한쪽만 뜨고 산다. 한쪽 눈에 보이는 딱 그 정도만 준비한다. 나중에 돌발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감겼던 한쪽 눈을 탓한다. ’어차피 안 보였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라고 의도가 다분한 합리화를 한다. 돌발 상황이 몰고 오는 스트레스에 무뎌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우즉흥, 좌경솔한 삶은 일상의 만족도를 높인다. 기대가 없기에 생기는 의외의 결과들이 나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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