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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Oct 21. 2021

일단 사양하고 보는 습관에 대하여

그냥 좋아해 주면 안 돼?



받을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선물을 준비한다. 상대방의 취향과 성향을 곰곰이 돌아본다. 선물을 건넸을 때 표정은 어떨까? 기뻐하겠지? 혹시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그래도 준비한 정성을 생각해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선물을 결정한다. 설렘과 기대가 정확히 반반 섞인 선물을 건네는 순간, 돌아온 말은 이거였다.    

뭘 이런 걸 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김이 팍 샜다. 괜한 짓을 한 건가 싶었다. 거짓 연기라고 해도 그냥 좀 좋아해 주면 안 되나? 까칠한 마음이 불쑥 밀려왔다. 떨떠름한 표정을 감지하는 순간 주변 공기가 –5도쯤으로 떨어진 게 느껴진다. 단순히 선물이 마음에 안 들었구나 싶었지만 오해였다. 나중에 꽤 기뻐했다는 사실을 제삼자를 통해 전해 들었다. 실망한 것도 아니고, 악의도 없었고, 그저 일단 사양하고 보는 습관이 짙게 밴 행동일 뿐이었다.      

 

사양(辭讓) / 명사
겸손하여 받지 아니하거나 응하지 아니함. 또는 남에게 양보함.     


나 역시 일단 사양하고 보는 습관에 젖어 있던 시절이 있다. 아마 이 습관은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받은 교육의 결과가 아닐까? 집에 손님이 오시면 빈손으로 왔다며 용돈이나 하라고 지폐 몇 장을 건넨다. 이 순간 부모님은 빠르게 말을 얹는다. “아휴, 애들한테 무슨 돈을... 애가 벌써 돈을 알면 안 돼요. 괜찮아요.” 이미 마중 나가 있던 내 손은 이 말에 순간 길을 잃는다. 일찌감치 그 돈으로 뭘 할지 큰 그림을 세워둔 나의 계획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부모님과 손님 사이의 답이 정해진 뻔한 실랑이가 잠시 이어진다. 결국 빳빳했던 돈은 구깃구깃해진 상태로 내 주머니에 들어온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너 잃어버릴까 봐 엄마가 보. 관. 해준다'는 명목 하에 엄마의 지갑으로 들어가지만) 그때 알았다. 아! 뭘 받으면 일단 사양해야 하는 거구나. 넙죽 받으면 염치없는 사람이 되는 거구나. 겸손이 1순위인 K 유교식 교육은 이렇게 내 머릿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선물을 받아도, 제안을 받아도, 칭찬을 받아도 일단 사양부터 하는 게 버릇이었다. 나 같은 내향형 인간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다. 그 누구에게도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나 따위를 위해 신경 쓰고, 시간과 돈을 쓰는 게 부담스러웠다. 상대방이 나를 위해 에너지를 쓰는 게 미안했다. 받으면 다시 그 이상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니 애초에 받지 않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이 생각은 타인의 ’ 주는 기쁨‘을 엉망으로 만드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양이었다. 겸손이 미덕인 K-유교 교육을 잘못 받으면 이렇게 이상한 결론에 닿는다.


그러던 내가 달라졌다. 받는 것보다 주는 기회가 많이 생기면서 변했다. 주는 입장이 되어 보니 내 악의 없는 습관적인 사양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닿았을지 느껴졌다. 이 ’ 과한 겸손에서 우러난 사양‘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바꿨다. 역시 사람은 경험이 중요하다. 자꾸 해보면 그제야 보이는 게 생긴다. 내가 생각한 만큼 상대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보답을 바라면서 건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주고 싶으니까 주는 것일 뿐. 대단한 책임감이나 의무감, 대의명분 따위는 없다. 그러니 상대방의 몫인 주는 기쁨까지 빼앗아 갈 권리는 내겐 없다.


일단 사양하고 보는 행동이 몰고 온 순간적인 냉기의 여파가 오래 남는 편이다. 묘하게 굳은 표정, 짜게 식은 눈빛, 순식간에 쳐진 입꼬리가 마음속에서 맴돌아 며칠을 찜찜한 채로 지낸다. 기뻐해 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뭐 큰돈 드는 일이라고. 뒤늦게 후회하느니 순간의 ‘받는 기쁨‘을 만끽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일단 받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을 상대방에게 표현한다. 그게 받는 사람의 의무이자 도리다. 일단 건네받은 선물의 가격이나 크기, 칭찬의 강도나 조언의 실용성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를 위해 시간과 돈, 에너지를 써줬다는 자체가 고마운 일이니까. 그것만으로도 나의 만족도는 100%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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