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완연한 엄마 손이네
긴 추석 연휴를 앞두고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파릇한 스무 살 언저리에 처음 만나 어느새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시간보다 함께 쌓아 온 시간이 더 긴 사이. 지난해 여름 친구 아버님 장례식장에서 만난 후 약 1년 만이었다. 시국이 시국이라 점심에 만나 ‘남이 해주는’ 맛있는 밥을 먹고, 디저트와 커피를 포장해 와 근처 공원에 자리 잡았다.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새내기 시절로 돌아가 수다력을 불태웠다. 일, 가족, 사람, 돈, 미래, 꿈 등등 다양한 이야기가 회전목마처럼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반복됐다.
고만고만한 성적으로 같은 대학, 같은 학번, 같은 과 동기가 된 우리. 하지만 이제는 사는 동네, 집 평수, 통장에 찍히는 월급, 키우는 자녀 수의 차이만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집과 일터, 동네 언저리가 생활 반경의 전부인 친구들. 간만에 바깥세상 공기를 맡는다는 그녀들의 목소리와 표정엔 해방의 기쁨이 넘쳐났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쾌감 때문인지 빨갛게 달아오른 광대가 들썩거렸다. 한창 흥이 오른 친구들을 잠시 바라봤다.
20대 초반의 생기야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나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전히 처음 만났던 그때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진 않았다. 세월의 먼지야 쌓이는 게 당연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말투와 성향, 습관들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선이 음료 컵을 쥔 손에 다다랐을 때 이 생각이 멈췄다.
'어? 이제 완연한 엄마 손이네'
적게는 하나, 많게는 셋까지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의 손에서 엄마 손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두툼한 뼈마디, 거칠한 손등, 군데군데 박힌 굳은살, 바짝 자른 손톱. 걸리적거린다며 고무장갑을 마다한 채 맨손으로 청소며 설거지 등 각종 집안일을 하는 엄마의 손과 다르지 않았다. 뽀얗고, 가녀린 손을 가졌던 친구들은 엄마가 됐고, 붕어빵 틀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똑같은 엄마 손으로 변했다.
혹시나 하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 모두가 부러워했던 A의 손을 유심히 살펴봤지만 역시였다. 종잇장같이 가녀린 체구에 성냥개비처럼 작고 가는 손으로 유명했던 모범생 A. 시험 때마다 펜을 쥐고 써 내려간 글자가 빽빽하게 채워진 시험지 두 장을 내고서야 시험장을 빠져나와 모두를 놀라게 했던 친구다. 말로 엄마를 이겨 먹으려고 하는 언어 천재 딸을 키우는 사이 A의 손도 완연한 ‘엄마 손’이 됐다. 코스모스같이 목도, 팔도, 다리도 가늘었던 B. 에너지 넘치는 아들 둘, 딸 하나를 키우며 강철 엄마로 살다 보니 거칠어진 목소리만큼이나 손도 거칠거칠했다. 동기 중 가장 빨리 엄마가 된 B가 출산 전, 한동안 못 만날 거 같다며 산처럼 부른 배를 안고 등장했을 때 다들 애가 애를 낳는구나 했다. 술자리를 사랑하고, MT에 빠지지 않을 만큼 그 누구보다 놀기 좋아하면서도 엄마의 삶을 선택했기에 속세의 쾌락과 잠시 인연을 끊어야만 하는 B의 현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뱃속에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아이가 자라 이제 곧 중학생이 된다. B의 손마디가 두꺼워지는 사이 아이는 훌쩍 커버렸다.
아이가 생기기 전이라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엄마가 되면 싱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주 손을 써야 한다. 아이를 낳고, 씻기고, 먹이고, 키우는 일에 엄마의 손이 수없이 닿아야만 한다. 네일케어는커녕, 수없이 물이 손에 닿아야 하니 ‘미션 클리어’를 위해 쫓기다 보면 끈적이는 핸드크림을 바르는 일조차 사치다. 청소는 로봇 청소기가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설거지는 식기 세척기가 하는 세상. 어른들은 말한다. ‘기계가 다 해주는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좋은 시절에 태어나 편하게 살면 감사한 줄 알아라.‘ 로 시작되는 라떼 토크가 떠올랐다. 시대마다 각기 어려움은 있다. 인공지능이니, 사물 인터넷이니, 스마트 홈케어니 나 같은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기술과 낯선 과학 용어들이 난무하는 시절이지만 사람의 손이 꼭 닿아야 해결되는 문제들이 있다. 기계가 못하면 사람이 해야 하고, 대다수의 가정에서 많은 경우 이런 일은 엄마들의 몫이 된다. 그렇게 엄마들의 손은 거칠어지고, 뼈마디는 굵어진다.
엄마를 볼 때마다 목울대에 전기가 오른 듯 아릿해지고, 눈가에 스팀다리미가 내뿜는 뜨거운 수증기가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이제 친구들을 보면서 느낀다. 머지않아 오롯이 자신의 이름으로만 산 시간보다 ○○의 엄마라는 역할이 하나 더 추가된 삶을 사는 시간이 길어지는 때가 올 것이다. 절대 쉽지 않은 엄마라는 ’ 퀘스트‘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친구들이 눈부시게 멋지다.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내가 친구들을 응원할 방법은 뭘까? 생각해 봤다. 엄마라는 무게에 짓눌려 지쳐 있을 때, 잠시 이렇게 만나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오롯이 친구라는 이름 두 글자에 충실한 즐거움을 함께 나눠주는 거겠지? 맛있는 거 먹고 수다를 떨며 에너지 채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또 잘 살면 되는 거 아닐까? 오후 6시, 4인 이상 집합 금지 시간에 맞춰 헤어졌다. 몸은 동서남북 각자의 집으로 향하고 있지만, 영혼은 여전히 단체 카톡방에 옹기종기 모여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곳에 별다방 커피 기프티콘을 뿌렸다. 뭘 좋아할지 몰라 내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노로 보냈다. 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이라도 잠시 묵직한 엄마라는 역할을 내려두고 별거 없는 수다를 하염없이 떠는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기분을 채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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