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두 달이나 남았잖아?
1년 열두 달 중 가장 좋아하는 달을 하나 꼽으라면 무조건 11월이다. 한겨울에 태어나서인지 더위에 유독 취약하다. 그래서 6월, 7월, 8월에는 늘어진 엿가락처럼 맥을 못 춘다. 알레르기성 비염인이라 가뜩이나 짧은 봄, 가을에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콧물을 닦다 끝난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연말, 연초의 들뜸으로 정신없다. 그에 비해 좋게 말해 차분하고 솔직하게 말해 심심하기 그지없는 달, 11월. 하지만 11월도 자세히 보면 무척 분주하다. 보통의 11월에는 첫눈이 오면 토피넛 라떼를 마셔야 하고, 김장김치(Feat. 수육)를 만들고 먹어야 하고, 붕어빵을 개시해야 한다. (어째서 나란 인간에게 설렘의 근원은 먹는 게 이렇게 많은 지분을 차지할까?) 빨간 날 하나 없이 자비 없는 달이지만 1년 중 가장 많은 설렘이 알알이 박혀 있는 한 달이기도 하다. 이때가 아니면 제맛을 잃어버리는 것들이 천지니 제대로 느끼고 누리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2021년 마감 임박’ 사인이 깜빡이기 시작하는 11월. 바로 직전 비행기 관련 글을 쓰며 연초, 다이어리 맨 앞장에 써뒀던 <To Do List>를 다시 한번 꼼꼼히 봤다. 지독한 계획형 인간이라 그런 걸까? 분명 가벼운 희망 사항 정도로 적어뒀는데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제는 시간. 11월이 시작됐으니 올해가 두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졌다. 다이어리에 써둔 내용을 점검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다이어리 꼬박꼬박 쓰기
-> 개학 앞둔 초등학생처럼
마감에 쫓겨 시간이 날 때마다
이 빠진 일기들을 채우고 있음
▶ 책 ○○○권 읽기
-> 초과 달성
▶ 잠들기 전 무조건 책 한 쳅터씩 읽기
-> 중간에 흐지부지됐지만
책 전체 분량을 따져 보면
그 이상 읽었을 거라는
이상한 계산법으로 자기 합리화 중
▶ 두 번째 책 준비하기
-> 목표 달성 (9월 30일 출간 완료)
▶ 비행기 3번 이상 타기
-> 초과 달성
▶ 하루에 ○○○○○보 걷기
-> 초과 달성
▶ 몸무게 ○○kg 유지하기
-> 근육을 늘리는 걸로 변경
예상치 못하게 빈혈 진단과 요가 시작으로
잘 챙겨 먹고, 부지런히 몸과 마음의 근육을 쌓는 일에 매진 중이라 몸무게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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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씨 교정 책 3번 반복해 쓰기
-> Aㅏ... 3번은커녕 1번도 다 끝내지 못함
대다수의 목표를 초과 달성하거나 변수에 맞게 조정했지만, <글씨교정>이 목표 앞에서 만큼은 한없이 작아졌다. 사실, 글을 자주 또 많이 써도 대부분을 키보드를 쳐서 쓰니 손글씨를 쓸 일은 거의 없다. 간단한 메모를 제외하고 1년에 손글씨를 써야 할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담당자가 체크해 준 항목의 내용을 적을 때, 계약서를 쓸 때, 책이 나와서 사인을 해야 할 때, 손편지를 써야 할 때가 전부다. 그러니 딱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기야 나만 보는 거니 개발새발 써져도 날짜를 채우는데만 집중해도 충분했다) 이번에도 연초에 글씨 교정 책을 몇 번 들춰보다 언제나 그렇듯 책장 구석에 쑤셔 뒀다.
하지만 최근 책을 내고, 책 속지에 사인하며 간단한 감사 메시지나 긴 손편지를 적어야 할 때가 되어서야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미리 글씨 연습 좀 해둘걸... 작년에도 똑같은 때에 똑같은 내용으로 후회했다. 연초에 글씨교정을 목표로 잡았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1년 후 똑같은 후회를 하고 있다니... 나란 인간의 한결같은 무심함을 어찌할까?
마음먹은 김에 실행해보자 싶어서 검색창에 글씨교정법을 검색했다. 이미 내겐 손글씨 교정 책이 있지만 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그러다 이 분야의 이름난 유튜버의 동영상까지 보게 됐다. 알록달록한 컬러 팬으로 포인트를 딱딱 집어 설명하는 강의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어수선한 쑥대밭 같은 내 글씨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갈했다. 손글씨 전문 유튜버의 작품은 부지런한 농부가 가꾼 대평야를 보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글씨를 바르게 법은 간단했다. #높이 #크기 #간격을 맞춰 쓰면 반듯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건 #겹쳐_쓰기, #끊어서_쓰기, #연속해서_쓰기. 글씨가 산만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서두르지 말 것. 빨리 끝내고 싶어서 속도를 내면 높이도, 크기도, 간격도 맞추기 힘들다. 한 글자를 쓰더라도 선 하나, 점 하나를 정성 들여야 한다. 그 순간은 지루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그 과정들이 쌓여야 비로소 반듯한 글씨가 완성된다. 흐트러진 글자들이 모여 깨끗하고 깔끔한 글씨가 되는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바른 선이 모여, 반듯한 글자가 되듯 바른 습관이 모여, 반듯한 사람이 된다. 잠깐이니까 괜찮겠지 하며 다리를 꼬고 앉기 시작했던 행동은 습관이 되고 골반을 뒤틀어 척추까지 무너뜨린다. 고통에 시달리다 병원으로 향한다. 큰돈을 쏟아붓고, 의사의 걱정 어린 잔소리 폭격을 견뎌 내도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진 않는다. 켜켜이 쌓인 잘못된 습관으로 이미 뼈는 굳어졌으니까. 그래서 시작할 때 좀 귀찮고 불편해도 바른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 바른 습관을 생기면 결과도 반듯하다. 반듯한 하루가 모여, 바른 인생이 된다.
2021년은 아직 두 달이나 남아 있다. 평생 써 온 굳은 날림 글씨를 교정하려면 글씨를 처음 배울 때 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거다. 글씨를 바꾸기에 두 달은 분명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습관을 들이기에는 부족한 시간은 아니다. 글씨 교정 책을 3번 반복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선 하나, 점 하나 바르게 찍는 연습부터 하기로 다짐했다. 바른 습관을 들이면 반듯한 글씨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러다 보면 올해가 다 가기 전에 3번은 채울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앞서 나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글씨를 가다듬다 보면 내년 이맘때쯤에는 최소 휴먼지렁이체는 벗어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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