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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Nov 08. 2021

<스우파>와 유령 아이돌의 상관관계

대세 콘텐츠와 거리 두기를 하는 이유



평범한 오후, 갑자기 ‘급만남’ 요청이 툭 떨어졌다. 한동안 잠잠했었기에 더없이 반가운 이 기회를 냉큼 잡아채 후다닥 약속 장소로 향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못 본 사이 어떻게 지냈는지 간단히 안부 인사가 오갔다. 다들 웃고 있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짠내 나는 날들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손 놓지 않고 살고 있으니 이렇게 다시 만나 수다를 떨 수 있다며 고마움 가득 담은 안도를 주고받았다. 맥주잔이 비워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수다 주제는 평소의 궤도로 돌아왔다. 핑-퐁. 각자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탁구공이 네트를 오가듯 주고받기를 한참. 단계적 일상 회복이 시작되는 시점, 어색한 변화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제 대면 공연도 시작하던데? 스누피 콘서트."  

"스누피? 오... 공연하는구나..."     


스누피... 이름이 낯설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아이돌 그룹인가? 이름이 귀엽다. 요즘 인기 있나 보군. 거리 두기 단계 조정되자마자 오프라인 공연을 하다니... 내 머릿속에는 이 정도로 의식의 흐름이 흘러갔다. 굵직한 아이돌 아니고서야 새싹 아이돌의 세세한 사정까지는 모르는 돌. 알. 못. 그래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알아보지 않았으니 몰랐을 그들의 세계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니 얘기를 끊어 가면서 확인할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참 스누피에 대한 얘기가 오갔고, 그렇게 아이돌 그룹 스누피는 흘러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누피’라는 그룹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됐다. 스누피는 소속사도 없고, 데뷔한 적도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에 가까운 그룹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그 이야기가 시작될 때쯤 마침 팀 회식인지 건장한 사람들 대여섯이 우르르 들어와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다. 술이 들어가니 한층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시끌시끌한 소음 때문에 내 귀에 오류가 생겼다. 이 모든 기운이 몰려 탄생한 그룹이다. 친구들이 말한 콘서트를 한다는 ‘스누피’는 아이돌 그룹이 아니라 여성 댄서들이 출연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우파 -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였다. 춤을 사랑하는 ‘언니들의 멋짐’을 보여준 그 프로그램 말이다. #ㅅ+#ㅍ+#콘서트라는 음성 조각이 모여 내 머릿속에서 ‘스누피‘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아이돌 그룹을 창조해 낸 거다.  


매번 이런 식이다. 영영 속세를 등지고 살 ’ 자연인‘도 아니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것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사람 많은 곳은 체질적으로 일단 피하고 보는 성향이다.  관심이 없으니 챙겨 보지 않고, 챙겨 보지 않으니 흘려듣기 일쑤다. 물론 관심 없는 프로그램이 <스우파>가 처음이 아니다. <쇼 미 더 머니>, <스카이 캐슬>, <D.P>, <펜트하우스> 전에도 넘치게 많았다. 대세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난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떠 있는 외로운 섬이 된다.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것조차 내가 택한 것이기 때문에 불만은 없다. 이야기에 끼고 싶으면 부지런히 콘텐츠를 챙겨 먹으면 된다. 하지만 난 #서바이벌 #막장 #암투 #생존 등등 폭격하듯 쏟아지는 자극적 콘텐츠의 공격을 다른 차원에서 온 생명체를 만난 듯 멀뚱하게 대한다. (그나마 한국을 넘어 세계를 강타한 화제작 <오징어 게임>도 막차 중의 막차를 타고 얼마 전에야 봤다. 콘텐츠 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다 대체 이게 뭔데 지구를 들썩이게 만드나? 하는 호기심에 이끌려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잔인한 장면은 건너뛰기 버튼을 수 없이 누르면서 겨우 완주했다.)   

   

대세 콘텐츠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은 사실 딱히 불편하지 않다. 해당 콘텐츠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 할 말이 없어서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흡수하기 바쁘다. 미안하게도 답답한 건 상대들이다. 함께 왁자지껄 떠들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냈을 텐데 대부분은 멀뚱하다. ’ 티키타카‘가 어렵고 심할 경우 A부터 Z까지 설명해야 하는 위험에 닥칠 수도 있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스몰토크 소재로 쓰기 좋은 대세 콘텐츠. 그런데도 난 왜 대세 콘텐츠와 자발적 거리 두기를 하는 걸까?     


사람들이 열광하는 대세 콘텐츠에는 공통점이 있다. 서사.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는 판타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견뎌야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듯 한 번에 편안하고 안전하게 목표에 닿는 콘텐츠는 없다. 다치고, 깨지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야만 주인공의 서사가 탄탄해진다. 그 과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열광하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자극. 보통 고춧가루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 매콤한 청양고추를 넘어, 캅사이신 소스, 마라 소스가 듬뿍 들어가야 짜릿함이 전해진다. 그래서 자극적인 콘텐츠를 보고 나면 소위 기가 빨린다. 기운이 쭉 빠진다. 남들의 감정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흡수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쉽게 공감하고, 몰입되는 편이다. 일부러라도 이렇게 거리를 두지 않으면 그 여파 안에서 며칠이고 허우적거린다. 지금 난 내 몫의 날들을 후회하지 않도록 채우는 게 최우선의 목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난과 좌절, 성장과 성공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뿐이다. 그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생각의 그릇이 넉넉했다면 뷔페에 온 것처럼 이것도 담고, 저것도 담겠지만 한 번 먹을 때 한 가지밖에 담지 못하는 작은 그릇의 소유자일 뿐이다.

        

’ 세상 사람들 다 보는데 너는 왜 안보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취향이 아니어서. 득보다는 실이 많아서. 남들이 다 본다고 나까지 꼭 봐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 대세 콘텐츠와 떨어져 있으니 덕분에 이렇게 스누피라는 유령 그룹을 탄생시켜 본 경험이 생겼다. <스우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픽 하고 웃음이 터질 기억 하나 만들었으니 그걸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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