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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03. 2021

사람에게서 빛이 나는 순간

본업 말고 좋아서 하는 일의 힘


평범한 평일 저녁, 서울 번화가의 먹자골목.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골목 사이 허름한 건물의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세상의 번잡스러움과는 정반대의 팽팽한 긴장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담한 지하 연습실에서는 두 달에 한 번 있는 아마추어 뮤지컬 동호회의 평가 시간이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지인 덕분에 운 좋게 흔히 경험할 수 없는 현장에 초대받았다. 뮤지컬을 보기만 했지, 이렇게 연습실에 와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들의 연습을 참관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그곳에는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 시간 동안, 연습실 벽에 도배된 거울로 참석자들을 흘깃 훔쳐봤다. 복잡한 신도림역 환승 통로를 무심한 표정으로 걷는 회사원, 지옥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출퇴근 시간 9호선을 타서 압사당하기 직전 기진맥진한 표정의 직장인, 얼큰하게 취해 벌게진 얼굴로 1호선 막차를 겨우 탄 팀장님, 다이어트를 위해 이제 탕비실에서 샐러드 도시락을 먹겠다며 선언했지만 목 맥힌다 육개장 사발면을 뜯으며 슬쩍 눈치 보는 과장, 점심 식사 후 긴 줄 끝에서서 테이크 아웃할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지루한 표정의 대리, 오랜 취업 준비 끝에 비로소 자기 얼굴 박힌 출입증을 목에 건 게 마냥 신난 늦깎이 신입 등등 사무실 밀집지역에서 봤음직 한 보통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취미로 뮤지컬을 배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대부분 본업이 따로 있고, 짬짬이 시간을 내서 전문가 선생님께 노래를 배운다. 그렇게 시간과 실력이 쌓이면 공연을 하기도 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서 하는 일. 돈 한 푼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내고 배우는 일.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년 째 뮤지컬에 빠져 일과를 제외한 귀한 시간을 이 작은 연습실에서 보내고 있다. 지인을 제외하면 전부 초면이고, 그 외의 신상정보도 일절 모르는 상황. 내게 주어진 한정된 정보 속에서 ’ 뮤지컬’ 보다는 ‘아마추어’란 단어에 무게 중심을 두고 본격적인 평가가 시작 되길 기다렸다.      


본격 시작 전, 투표용지가 내 손에도 쥐어졌다. 서로가 평가를 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명을 뽑기 위한 종이. 우승자에게는 선생님과 함께 녹음실에서 녹음을 하고 음원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 이 음원은 음원사이트에 올라가 수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프로 데뷔 오디션을 볼 때 포트폴리오로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음원을 가졌다는 기쁨이 전부인 그들만의 상이었다. 그저 참관 정도로 생각했기에 투표용지가 부담스러워 지인에게 슬쩍 물었다. 나 따위가 뭘 안다고 감히 평가하냐고. 지인은 괜찮다고 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해보는 것만으로도 경험치가 쌓이는 거니까. 들었을 때 마음이 끌리는 노래를 한 사람에게 투표하면 된다고 했다. 그제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첫 번째 사람이 자리에 섰다. 개미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진지하고 고요한 시간. 호흡을 가다듬은 1번 타자가 진행자에게 눈빛을 보내자 반주가 흘러나왔다. 첫 소절이 시작됐을 때, 뭔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잘못된 건 참석자들의 노래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아마추어라는 단어에 꽂혀 살짝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보기 시작했던 나는 척추를 바로 세우고 엉덩이에 힘을 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느긋하게 퍼질러진 자세로 들을 노래가 아니었다. 프로들보다 스킬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진심만큼은 가득했다. 여기서 1등을 한다고 프로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갈고닦은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한음 한음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첫 주자의 노래가 끝나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후련한 표정의 1번 타자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연이어 참석자들의 노래가 이어졌다. 뮤지컬 갈라쇼를 보듯 다양한 작품의 곡들이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슬쩍 돌아봤다. 처음, 이 연습실에 들어섰을 때 지하 특유의 어두컴컴함이 있었다. 평가를 위해 준비된 자리를 밝게 하느라 일부러 조명을 좀 어둡게 낮췄나 싶을 정도로 톤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래가 끝나고 다시 본 그곳은 오히려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순히 노래를 끝냈다는 후련함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의 반짝임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핏기도 없고 생기도 없다. 걸으니까 걷고, 숨이 붙어 있으니까 사는 사람들. 아침이면 눈을 뜨고, 정신없이 살다가, 지쳐 눈을 감는 날들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매일 반복 재생되는 관성에 젖어 시들어 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흔히 벌어진다. 꼬마전구의 불빛처럼 연약한 생기로 겨우 삶을 연명하다 보면 언젠가 그 작은 빛마저 꺼지게 마련이다. 형광등 100개 켜진 거 같은 아우라까지는 아니어도 활력을 넣어 일상에 LED 전구처럼 에너지 소비량은 적지만 길고 오래가는 생기를 불어넣어 줄 무언가가 저마다의 가슴속에 있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에게 1표씩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효표가 되지 않게 신중하게 한 분을 택해 체크한 후 투표용지를 진행자에게 건넸다. 흔치 않은 공연을 볼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뮤지컬을 향한 열정으로 후끈하게 달아오른 평가 현장을 뒤로하고 연습실 문을 여니 11월 말의 찬바람이 훅 얼굴에 닿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나는 언제 저 사람들처럼 반짝였더라?

  얼굴에서 빛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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