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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13. 2021

카드사에서 전화가 왔을 때

이제는 빛바랜 권유의 방식



집을 나서기 위해 아침부터 바쁘게 준비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오전부터 전화 올 곳이 없는데 뭐지?’ 전화기를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니 낯선 번호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댔다. 최근 내년에 있을 선거를 앞두고 출마 예정자나 여론 조사관련 전화를 몇 번 받았었다. 영혼 없는 기계음이 들리면 당장 끊어 버릴 마음이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나 조용히 귀를 기울였는데 반응이 없다. 혹시나 하고 ’여보세요‘ 하고 말을 내뱉으니 그제야 기계음이 아닌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 고객님, 안녕하세요. **카드 상담원 누구누구입니다. 저희 **카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다름이 아니라 안내 사항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죠?     


네. 장기 가입 고객을 위한 특별 혜택의 일환으로 기존 보험이 부족한 보장 부분을 블라블라... 


카드사와 보험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는 순간 김이 팍 샜다. 아니 짜증이 차올랐다. 아침부터 영업 전화라니 지금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크게 한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삐죽해진 마음을 다독였다. 상대편도 그저 본분에 충실해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전 더는 보험을 들 여력이 없습니다.      


더 들라는 말이 아니고요. 어쩌구 저쩌구


호락호락 물러설 텔레마케터도 아니었다. 실적에 목말랐을 그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전화의 목적은 보험 가입이 분명한데 (보험을) 더 들라는 말이 아니라니. 어디까지 하나 잠시 듣고 있다가 속사포 래퍼처럼 내달리는 그를 막아섰다. 문장과 문장 사이 잠시 한 호흡을 가다듬는 그 찰나를 노려서.      


아니오. 안 하겠다고요. 이만 끊겠습니다.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문장을 끊어 말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단호박처럼 단호한 어투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그제야 물러섰다.   

   

알겠습니... 뚝뚝뚝...      


마지막 문장은 마무리되지 못한 채 전화가 끊겼다. 신호음만 덩그러니 남았다. 얼마나 오래 이 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동안 이 일을 하며 그에게 얼마나 많은 거절이 쌓여 왔을까? 생각해 봤다. 그가 원하는 보험 가입은 못 해주지만, 먹고사니즘의 괴로움을 아는 같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응원과 위로를 담은 마지막 인사로 ’ 수고하십시오 ‘를 준비했었다. 근데 이 말을 내뱉기도 전에 먼저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래 시간이 없겠지. 바쁘겠지. 아니다 싶으면 빨리 다음 타깃을 향해 접근해야 할 테니. 아예 전화를 안 받는 사람,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는 사람, 보험 영업이라는 사실에 화를 내는 사람, 나처럼 조금 듣다 끊어 버리는 사람 등등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권유를 하고, 거절을 받는 게 일상인 그에게 그저 오히려 별 내상 없는 순한 맛 전화일지 모른다.      


나도 이 텔레마케터처럼 권유하고 대부분 거절을 받는 게 일이다. 언젠가 대단한 배우를 섭외해야 하는 임무가 떨어졌다. 인맥, 물량 공세, (우리 기준에)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 등등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과는 No. 선배는 최후의 방법으로 그가 출연하는 연극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려 주차장에서 접근해 보라고 했다. 썩 내키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선배가 까라면 까야지. 커튼콜이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움직였다. 꽃다발을 들고 주차장으로 후다닥 내려갔다. 춥고 어두컴컴한 주차장에서 배우가 나오기를 오도카니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서 그토록 기다리던 배우의 그림자가 보였다. 얼굴 가득 최대한 미소를 장착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꽃다발을 건네며 공연은 감동이었다고 한참 달콤한 말을 건넸다. 으레 있는 팬과의 만남 정도로 생각했는지 한없이 친절하던 배우. 하지만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한참 우리의 목적을 전해 들은 배우는 팬을 향한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이미 거절한 내용을 다시 읊는 이 상황이 분명 불쾌했지만, 인자한 미소 안에 애써 숨기는 게 느껴졌다. ’ 선생님급은 이렇게 몸으로 부딪쳐서 정성을 보여줘야 해 ‘라고 했던 선배의 단언은 이 배우에게는 예외였다. 익히 들었던 소문처럼 그는 웃으면서 상처 주지 않고 거절하는 내공이 쌓일 대로 쌓인 분이었다.      


사실 공연장으로 가는 길, 이미 내 안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밑져야 본전. 일찌감치 매니저를 통해 거절 의사를 밝힌 배우를 다이렉트로 찾아가 몸으로 ’ 엉겨’ 보라는 어르신들이 제안한 방법은 그들 시대의 방법이었다. 제작진과 출연자 사이에 벽이 없던 시절의 해결책이다. 정과 의리, 정성으로 출연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대는 갔다. 쇼비즈니스 산업은 분업화, 전문화됐고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건 결정권자들이었다. 껄끄럽고 불편한 일을 대신 처리하는 매니지먼트사가 있고, 그걸 무시한 채 당사자와 1:1로 마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간절함 없는 섭외, 그 결말은 뻔했다.      


공중부양도 가능하다는 대통령 선거 출마 예비 후보의 투표 독려 음성메시지, 카드사 텔레마케터의 보험 권유, 나의 출연 섭외. 타깃과 모양새는 달라도 목적은 하나다. 바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한정적이던 정보와 선택지가 이젠 셀 수 없이 많아졌다. 필요하다면 내가 먼저 찾아 선택하는 시대. 애초에 사람이 좋고, 제품이 좋고, 기회가 좋았다면 권유하지 않아도 먼저 달려들었을 거다. 지금의 홍보나 권유 방식은 오히려 반발심만 더 키울 뿐이다.      


전철역을 빠져나오자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중무장을 한 채,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이 보인다. 그의 주변으로는 방금 버려졌음직한 따끈따끈한 전단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이 추운 날씨에 얼른 따뜻한 집으로 퇴근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굳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 전단을 받아 들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거리를 더럽히고, 종이를 낭비하는 전단을 나눠주는 구시대적 홍보 방법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한 후 더는 전단을 받아 들지 않는다. 시대는 바뀌었고, 권유 방식도 변해야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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