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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17. 2021

이 빠진 일기를 채우는 법

개학 앞둔 초등학생처럼 벼락치기로 쓰는 일기  


2021년을 시작하며 야심 차게 계획한 일기 쓰기.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면 어김없이 날아든 숙제 같은 일기가 아닌 그저 내가 쓰고 싶어서 쓴 일기는 처음이었다. 새해가 시작되면 몇 장 끄적이다 흐지부지한 적은 많지만, 중도 포기 없이 1년 가까이 꾸준하게 쓴 적은 올해가 처음이다. 하지만 초등학생 시절 방학 때마다 단련해 온 일기 미루기 습관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변함없다. 매일 밤 잠들기 전 한 줄이라도 적을... 리는 없고, 한 달에 생각날 때마다 두세 번 몰아서 일기를 쓰곤 했다. 그렇게 멱살 잡고 꾸역꾸역 끌고 온 일기가 이제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달려간다. 지금은 딱 개학을 앞둔 초등학생의 상황. 개학은 1월 1일인데, 내 일기엔 여전히 곳곳에 공백이 있다. 한창 유행이라는 다꾸, 즉 다이어리 꾸미기를 할 손재주도, 에너지도 없어 그날 있었던 일과 그때의 감정들만 텍스트로 적을 뿐인데도 그게 쉽지 않다. 


중간중간 이 빠진 날들을 돌이켜 보면 고작 몇 g도 안 될 다이어리를 펼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간이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미루고 미루다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021년 To Do List를 쓸 때 제일 먼저 적었던 일기 쓰기. 누가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 80%까지 달려왔는데 고작 게으름과 흐릿한 기억력 때문에 여기서 포기하긴 아쉬웠다. 그 20% 때문에 그간의 80%의 노력을 물거품 만들 순 없지. 이 빠진 일기를 채우기 위해 꼼수 아닌 꼼수를 발휘해야만 한다.       


# 카드 결제 내역을 소환한다

난 내 머릿속 저장 용량이 그 누구보다 작고 귀엽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를 믿기보다는 기록을 믿기로 한다. 내 머리는 제멋대로 기억을 미화하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테니. 여러 기록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선명한 건 카드 결제 내역이다. 언제 어디서 사용했는지 초 단위까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니 그 목록만 잘 봐도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뭘 했는지, 뭘 샀는지 기억이 돌아온다. 올해의 최고 잘산템 ’ 공기 팟 프로‘를 살 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렸는지. 리뷰를 정독하고, 쿠폰을 먹이고, 고심 끝에 결제 한 날의 두근거림을 이 빠진 다이어리에 채운다. 올해 시작한 잘한 일 중 하나인 요가. 지난 4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일 때문에 홧김에 요가를 시작하고 매트며, 옷이며 각종 용품을 사들이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도 카드 결제 내역 덕분에 되살아났다. 온라인 쇼핑의 경우 카드사에서 보내주는 결제 메시지에는 **페이처럼 모호하게 남겨지곤 한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쇼핑몰에 로그인하고 결제 내역을 뒤진다. 결제 항목과 배송 기록 등을 통해 개미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썼던 날들의 짜릿함을 일기에 고스란히 적는다.  

     

# 카톡 대화 내용을 소환한다

카드 결제 내역이 숫자로 남는다면 카톡 대화들은 텍스트로 남는다. 웃고, 울고, 화내고, 다독이고 감동받았던 날들이 이모티콘과 함께 날짜, 시간, 사람별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게다가 카카오톡은 대화 내용을 검색할 때 날짜로도 검색이 가능하다. 캘린더에 날짜를 선택하면 그날 나눴던 대화 속으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 두 번째 책을 계약하던 날, 계약 사실을 발표하며 순간의 설렘을 함께 나눴다. 뜨거운 응원과 축하가 쏟아졌다. 이 계약의 기쁨은 더없이 짧을 뿐이고, 곧 깊고 진한 무거운 책임과 자괴감으로 돌아올 걸 알기에 악착같이 즐거움을 만끽했다. 코로나 19의 기세가 한풀 꺾였을 때, 미루고 미뤘던 오랜 친구들과 다시 만났다. 햇수로 3년 만이었다.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던 시간 사이 어떤 일들이 있었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세한 보고가 이어졌다. 묵은 수다를 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더없이 소중했던 오늘의 만남은 그 자체로 고마웠다는 인사와 인증샷, 오늘의 정산을 위한 1/N 비용이 청구됐다. 정산금과 함께 다시 만날 때까지 잘살자는 응원의 커피 쿠폰도 함께 보낸 기록이 남아 있다. 그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좋은 세상이다. 터치 몇 번이면 돈도, 마음도 함께 보낼 수 있으니까.’        


# 사진 찍어 둔 책 속 문장을 소환한다

아무 걱정이 없을 때는 메모장에 차곡차곡 쌓아둔 책 목록을 뒤져 그때그때 땡기는 책을 읽는다. 베스트셀러일 때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일 때도 있고, 누군가가 추천한 책일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걱정거리가 생기면 그 해답을 찾아 관련 책부터 뒤진다. 세상의 모든 걸 유튜브로 배운다는 요즘 아이들의 마인드로는 몹시 비효율적인 해결책일지 모른다. 여행을 가고 싶을 때는 가고 싶은 여행지에 관한 책을, 요가를 더 잘하고 싶을 때는 요가 관련 책을, 책 쓰기의 괴로움에 휩싸여 있을 때는 마감을 앞둔 작가들의 고민이 담긴 책을 펼친다. 별도의 독서 노트나 기록용 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둔다. 내게 이미 기록은 '일기'만으로도 충분하다. 뭔갈 많이 오래 기억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수많은 텍스트 중에서도 마음에 콕 박히는 문장은 기어코 사진으로 남긴다. 사진 폴더에서 잠자고 있던 문장들을 깨워낸다. 그리고 그 얼굴을 확인하면 그때 왜 내게 이 문장이 와닿았는지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그 문장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게 만들었던 감정들은 대부분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년 동안 수없이 여닫은 덕에 다이어리는 처음보다 통통해졌다. 반들반들 윤기가 가득했던 깔끔한 다이어리는 1년 가까이 되니 여기저기 낡고, 종이도 울룩불룩해졌다. 음료를 쏟은 적은 없지만, 뚜껑이 덜 닫힌 텀블러에서 남은 물기가 흘러 속종이 몇 페이지를 적셨다. 그 흔적처럼 지울 수 없는 수많은 기억이 다이어리를 꽉 채우고 있다. 1년 꼬박 다이어리를 쓰면 뭐가 달라질까? 궁금했다. 처음 일기를 쓰며 가졌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일 년 동안 쓴 다이어리를 후루룩 훑어보며 곰곰히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눈에 보이거나 살갗에 닿는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 겨우 1년밖에 안 해봐서 그럴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대단한 의미나 가치를 얻었다기보다 한 권의 다이어리에 <나의 1년>이 담겼다는 사실?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그래서 이미 난 내년용 다이어리를 마련해 놨다. 올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칸의 사이즈는 적고, 휴대성은 높인 다이어리가 대기 중이다. 글밥 많은 일기를 쓰기에 내 글씨나 손목 컨디션이 형편 없었다. 내년 이맘때쯤에는 이 작고 귀여운 일기장에 어떤 내용들이 채워져 있을까? 그게 궁금해 벌써 2022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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