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답은 단 하나, 김치볶음밥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 어떤 음식을 택할 것인가? 이 질문이 내게 툭 던져졌을 때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어날 리 없는 망상에 가까운 질문이지만 실제로 닥친 일인 양 고심했다. 일단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역시나 커피. 하지만 음료니까 단호하게 제외한다. 액체가 아닌 고체 형태인 보통의 음식을 떠올려 본다. 가히 영혼의 음식이라 할 수 있는 떡볶이를 택하자니 기분 좋은 날 제일 먼저 떠오는 치킨이 울먹인다. 이에 질세라 주기적으로 땡기는 삼겹살도 나를 잊지 말라고 아우성친다. 집 떠나면 제일 많이 먹게 되는 라면, 특별한 날을 위한 메뉴 갈비, 든든하게 먹고 싶을 때 고르는 돈가스, 긴 해외 체류를 끝내고 돌아오면 인천 공항에서부터 주문하는 비빔국수 등등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음식의 이미지가 슬라이드 필름처럼 빠르게 바뀌었다. 고민은 깊게, 고민하는 시간은 짧게. 지금 내 인생 모토에 따라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주홍빛 영롱한 자태의 그 음식이 트로피를 차지했다.
김. 치. 볶. 음. 밥.
(정상 컨디션이라면) 한 끼 한 끼에 최선을 다하는 나지만, 생존 욕구가 식욕을 밀어낼 때는 방법이 없다. 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허기를 면하기 위한 식사를 해야 할 때가 있다. 팔만대장경 뺨칠 만큼 글자가 빽빽한 <김밥 지옥>의 메뉴판 속에서도 김치볶음밥을 고른다. 맛이 없게 만들기 힘든 음식이기에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다. 대단한 반찬이 필요 없는 완벽에 가까운 한 그릇 음식. 김치볶음밥 특유의 합리성과 편의성이 나를 김치볶음밥 마니아로 만들었다. 김치볶음밥을 향한 이토록 지독한 사랑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지금처럼 급식이 도입되기 전, 거의 마지막 도시락 세대였던 난 고 3 시절 3개의 도시락을 가방에 쑤셔 넣고 해가 뜨기도 전 집을 나섰다. 잠자는 시간 빼면 아침 6시부터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무식하게 학교에 메어 있어야 했던 그때,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면서 삼시 세 끼를 해결하는 방법은 김치볶음밥이었다. 내게 밥보다는 잠이 더 필요했던 그때 엄마는 해뜨기 전부터 도시락을 쌌다. 번잡스러운 반찬도 필요 없었다. 거의 매일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혹시 한 가지 음식만 먹으면 영양이 부족할까 걱정했던 엄마는 때때로 햄을 섞거나 달걀 프라이를 얹는 걸로 살짝살짝 변화를 주기도 했다. 자그마한 도시락통 안에서 그 사소한 정성들을 마주할 때면 엄마가 보낸 응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끝난 오전 8시, 첫 번째 도시락을 연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김치볶음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신성한 교실에 시큼한 김치 냄새가 퍼질 새라 마시듯 뱃속에 밀어 넣는다. ‘김치볶음밥 파워’로 오전 수업을 마친 12시. 두 번째 도시락을 연다. 아침과 다르지 않은 자태. 온기는 사라졌지만 윤기는 여전하다. 아침보다는 느긋하게 김치볶음밥을 먹는다. 식곤증과 싸우며 오후 수업을 마친 6시. 마지막 도시락이 날 기다린다. 아침과 점심에 먹었지만 신기하게 저녁에도 잘 들어간다. 이 끝도 없는 단련 덕분이었을까? 성인이 되어서도 내 삶의 중간중간 김치볶음밥이 등장한다.
지금은 수다를 떨고 싶으면 무조건 카페에 가지만, 지금처럼 커피 전문점이 흔하지 않았던 90년대 후반에서 00년대 초반에는 술집이 아니면 음식을 파는 카페로 향했다. 보통은 오므라이스, 볶음밥, 덮밥, 돈가스 등등의 메뉴를 시키면 후식으로 탄산음료, 커피, 차등을 내어주는 곳. 푹신한 의자 뒤로 병풍처럼 높은 등받이가 있는 인테리어가 포인트인 그곳 말이다. 술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친구들과 만날 때면 으레 음식을 파는 카페에서 만나는 게 당연했다. 그곳에서도 역시 나는 김치볶음밥을 베이스로 하는 ‘김치 도리아‘를 시켰다. 그라탱처럼 김치볶음밥 위에 모차렐라 치즈를 수북이 쌓아 오븐에 구워내는 요리. 그걸 먹으며 수다도 떨고, 과제도 하고, 까마득한 우주처럼 멀게 느껴졌던 서른 언저리를 상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김치볶음밥 냄새가 켜켜이 배인 꽃무늬 소파에 파묻혀 꽃처럼 피었어야 할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100억 광년쯤 멀게 보였던 서른도 훌쩍 지난 30대 중반. 중국에서 8개월간 단기 외노자로 살던 시절에도 김치볶음밥의 존재감은 확실했다. 음식의 천국인 중국에서의 식생활은 매일이 축제였다. 자장면, 탕수육 말고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중국 음식의 신세계를 탐험했다. 하지만 그 축제도 한 달이 넘어가니 지겨웠다.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는 휴일이면 호텔방에 틀어박혔다. 기름진 외식에 지쳐 메신저로 업무는 물론 생활 전반까지 서포트해주던 통역 친구에게 SOS를 요청한다. ’나 김치볶음밥 좀 시켜줘...‘ 숙소였던 자그마한 호텔방 침대 위에 누워 김치볶음밥이 오길 기다렸다. 부탁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문을 빼꼼 열어 보면 배달 기사가 놓고 간 김치볶음밥 포장 봉지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결제도 이미 앱으로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배달 기사를 마주할 필요가 없다. 한국의 많은 식당에서 중국산 김치를 사용하고 있어서일까? 중국 소도시의 한식집도 한국 본토의 맛을 비슷하게 흉내 낸다. 다만, 차이라면 식용유를 과하게 사용하는 중국식 조리 방식이 익숙해서 인지 다 먹고 남은 그릇에는 기름이 흥건하다는 사실뿐이다. 이렇게 가까운 아시아는 물론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까지 세계 곳곳에서 김치볶음밥과 마주했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맛의 세계 각국의 김치볶음밥을 만날 때면 어디 가서도 굶어 죽진 않겠다는 확신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냉장고를 열어 본다. 이렇다 할 반찬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김치볶음밥이다. 김치통을 꺼낸다. 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열이 오르기 기다린다. 그 사이 재빨리 김치를 가위로 잘게 자른다. 팬에 적당히 열이 오르면 버터나 들기름을 두른다. 팬에 기름이 스며들면 잘게 자른 김치를 달달 볶다가 설탕과 간장을 살짝 넣는다. 김칫국물이 졸아들고 김치가 익었다는 향이 나면 찬밥을 넣고 섞는다. 볶음 주걱을 세워 쌀알이 뭉치지 않게 자르듯 볶는 게 포인트다. 팬의 내용물들이 조화롭게 뒤 섞이면 흰색이었던 밥알이 주홍빛으로 물들면 불을 끄고 후추를 톡톡 뿌린다. 여기에 그날의 취향이나 냉장고 컨디션에 따라 치즈나 달걀 프라이를 얹으면 쉽고 빠르고 맛있는 한 끼가 완성된다. 영원히 물리지 않을 내 인생의 음식, 김치볶음밥이 있어 차고 넘치는 고민의 시간이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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