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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17. 2022

새 신발의 신묘함

여행지에서 본 새 신발의 마법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엄마를 모시고 운동화를 사러 가는 거였다. 혈육들에게 지원받은 협찬금 찬스를 썼다. 일흔이 넘은 엄마의 관절은 닳고 닳아 수술했지만 완전히 통증에서 해방되진 못했다. 게다가 무지외반증으로 오래 고생했던 터라 엄마 발에 꼭 맞는 신발을 고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시황의 명령으로 불로초를 찾아 떠난 사신의 심정으로 심오한 신발의 세계를 샅샅이 뒤져야만 한다. 온라인 쇼핑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직접 발품을 팔고, 몸으로 부딪쳐야 한다.      


백화점부터 브랜드 매장, 멀티숍까지 곳곳을 뒤졌다. 젊은이들이 신는 어글리 슈즈는 무겁고, 가볍고 날렵한 러닝화는 발볼이 넓은 엄마 발에는 영 볼품이 없었다. 동년배 어르신들이 애용한다는 쿠션감 좋은 스테디셀러 워킹화도 소용없었다. 몇 군데 매장을 돌고 각양각색 신발을 수십 번 신고 벗었다. 엄마도, 나도, 직원도 지쳐갈 때쯤 이번 여행을 함께 할 운명의 운동화와 만났다. 3개의 흰색 줄이 사선으로 들어간 A사의 까만색 운동화였다. 볼도 넉넉했고, 쿠션감도 좋았고, 가격도 착했다.      


난 여행지에서 새 신발을 신지 않는다. 발 도장 찍는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 평소보다 더 많이 걷는다. 이런 여행에서 길들이지 않은 새 신발은 환영받지 못한다. 발과 낯가림이 중인 새 신발은 가뜩이나 피곤한 발을 더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앞두고 엄마께 운동화를 사드렸기에 그전에 여기저기 신고 다니며 발에 맞게 길들이라고 당부했다. 단지 시착만으로 발과 신발이 친해질 순 없으니까. 새 신발과도 서먹서먹한 기운을 날릴 ’ 아이스 브레이킹’이 필요했다. 내 신신당부가 무색하게 엄마의 운동화는 공항버스를 타러 가는 그날에서야 박스 밖으로 탈출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휴 아까워서 어떻게 신니?      


여행지에 가면 새 신발을 신은 많은 사람을 본다. 가장 낮은 곳에서 그야말로 몸으로 부딪치는 험한 일을 해서일까? 신발은 옷이나 가방보다 ’ 새것‘이라는 티가 금방 난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깨끗한 새 신발을 신고 여행지를 걷고, 사진을 찍는다. 미백한 치아처럼 어색함이 곁들여진 환한 빛이 발끝에 맴돈다. 새 신발 덕분이다. 새 신발이 주는 특유의 설렘이 있다. 여행이 결정되고, 그곳에서 신을 신발을 사고, 새 신발과 어울릴 옷을 매칭해 보고, 신발 끈을 단단히 묵고 여행길을 떠나는 그 순간순간마다 설렘이 정직하게 쌓인다. 켜켜이 쌓인 그 설렘의 농도는 새 신발을 신고 걷는 발걸음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일상에서 신었다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 새 신발은 여행지에서 유독 크게 눈에 들어온다.      


’새 거‘를 갖는 일이 흔한 요즘 아이들이나 젊은이들보다 어르신들이 여행지에서 새 신발을 신은 모습을 보면 몹시 귀엽다. 그래서 새 신발을 신은 어르신이 시야에 포착되면 몰래몰래 훔쳐본다. 발걸음의 리듬, 무게감 그리고 표정까지... 세세하게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평소처럼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면 한없이 무거웠을 그 걸음들은 여행지에서만큼은 한없이 가볍다. 마치 뜨거운 팬 위에서 고소한 향내를 풍기며 볶이는 참깨처럼 통통 튀어 오른다. 여행을 왔다고 쑤시던 몸의 통증들이 사라지고, 무겁던 몸이 한순간에 가벼워진 건 아닐 텐데 발걸음은 선명하고 또 가뿐하다. 새 신발에는 분명 신묘한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귀여워서 마음 한쪽이 간질간질하고 또 울컥한다. 주름이 늘었다고, 거동이 불편하다고, 기력이 쇠했다고 설렘이 흐려지는 건 아니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마음만큼 따라주진 않지만, 새 신발을 신는 순간 없던 힘이 생긴다. 느려지던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바닥났던 에너지가 채워진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새 신발은 더 이상 새 신발이 아니다. 여기저기 흙이 들러붙고, 구겨지고, 뒤축은 닳았다. 새 신발은 다소 낡은 신발이 된다. 설렘이 떠난 빈자리에 편안함이 채워진다. 일상이라는 지루한 편안함 속에서 종종 새 신발을 신고 걸었던 여행지의 날들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가 스민다. 여행의 설렘을 마음에 도장처럼 찍어준 새 신발의 신묘한 그 힘 덕분에 따분하기만 했던 보통의 날들에 생기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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