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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Feb 04. 2022

이것은 벽돌인가? 멸치볶음인가?

벽돌형 멸치볶음을 씹으며 채운 다짐


 

급식 세대가 아닌 난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다.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면 책상을 붙이고 둘러앉아 각자의 도시락을 연다. 노란색 달걀말이, 노릇노릇하게 구운 한입 돈가스, 스테디셀러 햄구이, 달달 짭짤한 어묵볶음, 밥도둑계의 고인 물 장조림 등등 어머니들의 손맛이 작은 도시락 통에 넘치게 담겼다. 우리 집의 대표 선수는 <김치 볶음>이었다. 새콤, 아삭, 짭짤, 달달한 엄마의 김치 볶음을 먹고 난 친구들은 이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어머니께 내일은 두 배로 싸 달라고 해!   

김치 볶음이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반면, 멸치볶음이 등장하는 날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제일 밥을 느리게 먹던 친구의 도시락 뚜껑이 닫힐 때까지도 남아 있는 유일한 반찬이 바로 우리 집 멸치볶음이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고 짭짤 고소 바삭 달달한 보통의 멸치볶음과 달리 우리 집 멸치볶음은 축축했다. 진한 간장 양념 속에서 사우나라도 한 듯 축 늘어진 중멸치는 입안으로의 구원을 바랐지만 눈길 한 번 닿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빛도 들지 않는 감옥 같은 도시락통에 봉인되었다. 입맛 까다로운 사춘기 여자 아이들에게 비리고, 짠 우리 집 멸치볶음은 환영받지 못했다. 비단 멸치볶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비슷한 류로 진미채, 명엽채, 쥐포 같은 건어물을 이용한 요리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요리를 특별히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닌 우리 엄마. 근데 유독 건어물 요리에 대해서 만큼은 이런 오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까짓 멸치볶음이 뭐라고. 어른이 되고, 요리를 하나 둘 시작해 보던 때 엄마의 멸치볶음을 뛰어넘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망에 불타올랐다. 인터넷에서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필승의 멸치볶음 레시피를 찾아냈다. 멸치볶음의 요리 포인트는 양념과 불 조절. 설탕이나 물엿, 올리고당 같은 당류가 들어가야 단맛과 윤기가 나지만 자칫하면 탈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다. 일단 기름 없는 팬에 멸치를 볶아 수분기를 날리고 바삭하게 만들었다. 멸치가 노릇해지면 채에 쳐서 불순물들을 털어냈다. 말끔해진 멸치를 한쪽에 치워두고, 양념장을 만든다. 기름과 간장, 설탕 같은 단맛을 내는 조미료를 황금 비율로 섞어 팬에 우르르 끓인다. 걸쭉해진 양념에 멸치를 넣어 섞은 후 마지막으로 한식의 영원한 마침표, 참기름과 참깨를 뿌려 뒤적이면 끝. 반찬 통에 넣기 전 맛을 봤다. 고소하고 달달하고 짭짤하고 윤기가 자르르르 흐르는 보통의 멸치볶음이 완성됐다. 이 정도면 엄마의 축축한 멸치볶음 트라우마(?)를 씻어낼 명작이 탄생했음이 분명했다. 잠시 후 식사 시간, 의기양양 내 손에서 탄생한 명작 멸치볶음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젓가락이 멸치볶음에 닿는 순간 뭔가 단단히 잘못됐음이 느껴졌다.      


이것은 벽돌인가? 멸치볶음인가?     


딱딱한 멸치 사이를 파고들지 못한 젓가락은 민망하게도 허공에서 방황 중이었고, 이 상황에 나는 당황했다. 바다를 떠나 식탁에 오른 멸치들은 반찬이 된 자신들의 신세가 억울했을까? 흩어지면 죽고 뭉쳐야 산다는 신념에 절여진 듯 도저히 멸치를 뗄 수 없었다. 난 그저 한 입 크기 정도로 멸치볶음을 뜨고 싶었지만 내 젓가락에 딸려 온 건 그릇에 담긴 그대로 한 덩이가 된 멸치 묶음이었다. 이 강도라면 못을 박을 수도 있고, 위급한 상황일 때는 무기로도 사용 가능했다. 반찬을 만들고 싶었던 내 손끝에서 탄생한 건 결국 흉기였다. 내 멸치볶음은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원인을 찾아 인터넷을 뒤졌다. 그곳에는 나 같은 벽돌을 생산한 하수들이 넘쳐났다. 벽돌이 된 멸치볶음 앞에서 좌절하고 또 고수들의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요리 전문가들이 말하는 벽돌형 멸치볶음의 문제는 바로 ‘불‘. 설탕이나 물엿 같은 당류가 들어간 상태에서 열이 계속되면 식은 후 딱딱하게 굳는 거였다.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인의 디저트(?)가 된 달고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열을 가하면 액체가 되지만 식으면 굳는 설탕의 성질. 그걸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제2의 벽돌 멸치볶음 사태를 방지하려면 불 끄는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설탕이나 물엿 같은 단맛을 내는 양념이 충분히 섞인 후에는 불을 꺼야 한다. 일반적인 볶음 요리와 달리 멸치볶음은 멸치는 멸치 대로 볶고, 양념은 양념대로 볶아(섞어) 불을 끈 후 멸치에 양념 옷을 입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뜨거운 팬 위에서 오래 볶는다고 맛이 더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내 손에서 탄생했으니 이 폐기물(?)을 처리할 사람은 나뿐이다. 망한 벽돌형 멸치볶음을 씹으며 생각했다. 내가 딱딱해진 순간은 언제였더라? 내 인생이 더 맛있어지길 바라며 각종 양념을 쏟아붓던 시간들. 나를 뜨겁게 들볶던 시간들. 내 기대와 달리 그 시간이 지난 후 머리와 몸 그리고 입이 굳어 버렸다. 난 내가 달콤바삭짭짤한 인생을 살기 바랐는데 결과적으로 딱딱해졌다. 불 끄는 타이밍을 놓친 결과였다. 벽돌 멸치 볶음을 먹으며 다짐했다. 멸치 볶음도 내 삶도 오래 뜨겁게 볶는다고 맛있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니 불 끄는 타이밍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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