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행복한 프로 박수러
"딩동댕동댕~"
일요일 점심 풍경은 틀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똑같다. 다섯 음계의 실로폰 소리를 신호로 전국 팔도의 인싸들을 집합시키는 <전국 노래자랑>과 늘 함께한다. 외출하지 않는다면 거의 이 시간에 점심밥을 먹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습관처럼 틀어 놓은 TV 속 인싸 대잔치를 반찬 삼아 밥을 먹는다. 흥의 민족이라서일까? 아니면 수십 년간 노래방으로 단련된 경험 때문일까? 오늘도 전국의 가무 인재들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퐁퐁 흘러넘친다.
1980년 11월 9일 첫 방송한 <전국 노래자랑>은 40년 넘게 건재 중이고 각 방송사에서 매해 최소 2~3편의 음악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트로트, 록, 힙합, 포크, 뮤지컬, 국악, 크로스오버 등등 장르의 한계는 없다. 인구수가 고작 5천만을 겨우 넘긴 작은 나라에서 이토록 끊임없이 오디션 지원자들이 나오는 건 미스터리한 일이다. <전국 노래자랑>은 사실 지역명만 다르지 어느 회차든 비슷하다.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기상천외한 차림새의 출연자는 기본, 특산품 시식과 어떤 노래가 나오건 한결같은 흥을 내뿜는 객석 맨 앞 관객들의 인싸대잔치를 보는 재미는 덤이다. 전국 노래자랑과 다른 노래 오디션의 차이는 그저 인싸들을 찾아가냐, 인싸들이 찾아오냐의 차이일 뿐이다. 뭐가됐든 어마어마한 뭉칫돈을 쥐여 준다고 해도 감히 나갈 상상조차 못 하는 나 같은 인간은 매주 <전국 노래자랑>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나 같은 아싸가
인싸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가?
잘 살고 있다. 나 자신.
코흘리개 시절, 명절이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의 생신 등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꼬맹이들을 불러 나란히 세우곤 했다. 그리고 천 원짜리 지폐를 팔랑이던 고모나 삼촌이 말한다. ’이건 노래 잘하는 사람한테 줄 거야. 누가 먼저 할래?’ 눈동자가 2개 이상만 모여도 몸이 얼음처럼 굳는 나는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하지만 흥 많던 사촌들에게는 용돈 주머니를 채울 절호의 기회다. 특히 말도 잘하고 끼도 많았던 동갑 사촌은 첫 타자를 놓치지 않았다. 경쟁자들이 유치원에서 배웠을 고만고만한 동요를 부르며 율동할 때, 구성진 트로트를 택한 건 타고난 센스다. 게다가 10년 차 프로 가수 못지않은 무대 매너는 어른들을 홀리기 충분했다. 선곡부터 달랐던 사촌에게는 늘 칭찬과 박수가 쏟아졌다. 시작부터 압도적인 그녀의 무대에 ‘이번에는 나도 한번 해 봐?‘라고 슬쩍 불을 붙이려던 용기의 촛불은 초라하게 사그라들었다. 감히 앞으로 나설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 때처럼 쭈구리처럼 박수만 치는 게 그날의 내 임무였다.
<우리 집 노래자랑>은 아이들의 머리가 하나 둘 굵어진 후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대한민국에 발붙이고 사는 한 흥 발산 타임은 끝날 리 없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내게는 회식이란 임무가 떨어졌다. 삼겹살이든 치킨이든 두둑이 배를 채우고, 거나하게 취하면 향하는 곳은 어김없이 노래방(노래방이 아니어도 반주기계가 있는 여러 이름의 술집들)이었다. 좀 더 전문적인 환경에서 노래 경연이 벌어진다. 에코 빵빵하게 들어간 마이크를 잡고 바이브레이션을 뽐내는 알앤비 천재, 달팽이관을 강타하는 딕션의 랩신랩왕, 도가니로 바닥 좀 쓸어 봤던 왕년의 댄싱킹이 앞다퉈 등장한다. 다음날 출근해 맨 정신의 노래방 슈퍼스타들과 마주할 때는 사실 좀 낯설다. 지난밤의 알코올 내음 가득한 잔상이 머릿속에 재생되지만, 하이라이트는 애써 지우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대한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프로니까.
누구나 애창곡 한두 개쯤 가진 게 당연한 인싸의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니 나도 ’ 노력’이란 걸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내게는 그다지 가무에 재능이 없다는 걸.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가무적 재능은 없지만, 나도 나름의 무기가 있다. 바로 판깔아 주기. 노래방 회식에서도 적당히 장단을 맞추긴 하지만 독창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마저도 꼬꼬마 시절 어쩔 수 없이 떠밀려했지만 짬이 찬 지금은 굳이 나 아니어도 노래하고 싶어 안달 난 이들에게 마이크를 타이밍 좋게 넘긴다. 나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대신 내가 잘하는 박수치기를 한다. 주최자의 성향, 참석자의 연령대별 비율, 노래의 장르, 가창자의 바이오리듬까지 감안해 박수의 강도, 추임새의 폭, 환호성의 타이밍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다음 선곡이 없을 때는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국민 애창곡을 슬쩍 미리 끼워 놓으면 흥이 식을 리가 없다. 발 빠르게 선곡해 놓는 센스까지 갖춰야 한다. 스포트라이트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박수 잘 쳐주는 사람도 중요하다. 나는 그 둘의 균형이 잘 이뤄졌을 때 세상은 부드럽게 굴러간다는 걸 잘 안다.
어릴 때는 평생 남을 위해 박수만 치다 내 인생이 끝날까 봐 두려운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 재질을 파악하고 나니 그게 다가 아님을 알게 됐다. 난 무대에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것보다 무대 뒤에서 그들을 빛나게 해 줄 때 더 기쁘고 행복한 사람이다. 같은 상황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가가느냐에 따라 내가 들러리가 될 수도 있고, 전체를 진두지휘하는 감독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즐거움보다 두려움이 크다면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나야 한다. 남들이 잘하는 걸 못 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 없다. 나는 다른 걸 더 잘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흥을 북돋고, 원하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게 판을 깔아 주는 것. 내가 좋아하고 잘한다면 그걸 하면 된다. 애초에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보다 내가 가진 능력을 매치해 부각하는 것. 이게 바로 내가 찾은 인싸의 나라에서 아싸로 ‘잘’ 사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