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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02. 2022

지난겨울, 잘했다 나 자신

지난겨울 처음 해 본 잘한 일 몇 가지  

     

계절은 정직하다. 3월 달력이 펼쳐지니 공기에서 칼처럼 차갑고 매서운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여전히 쌀쌀하지만 3월은 시작됐으니 겨울을 보내 줘야 할 때가 온 거다. 보내기 전에 정리하는 게 순서. 유독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지난겨울을 마냥 지치지 않고 견딜 수 있던 에너지 드링크 같은 순간이 있었다. 겨울이었기에 할 수 있고, 겨울이었기에 더 의미 있었던 일들이 있었다.


눈 오는 날 궁 구경

비 오는 날은 비가 와서, 꽃이 피면 꽃이 펴서, 달이 뜨면 달이 떠서, 단풍이 들면 단풍을 보러 궁에 가곤 했다. 그때마다 상상했다. 궁 구경의 백미라는 눈 오는 날의 궁은 어떤 모습일까? 하얀 눈이 내려앉은 궁궐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무리 영상으로 보고 사진으로 봐도 실제로 눈과 살갗으로 체감하는 건 차원이 다를 테니 눈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뉴스에서 서울 전체 폭설을 예보한 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덕궁으로 달려갔다. 한적한 궁에 하얀 눈이 쌓이는 풍경을 상상하며. 잔뜩 설레서 궁 안으로 들어간 순간 놀랐다. 정말 눈이 그림처럼 쌓여서. 또 사람이 내리는 눈송이만큼 많아서. 근처 사무실에서 급하게 나온 듯 가벼운 차림의 사람부터 한복 차림의 외국인 관광객, 작정하고 출사를 온 대포 카메라를 든 전문가까지... 그 어느 때보다 궁 안은 북적였다. 각자의 방식으로 눈 오는 궁을 즐기고 있었다. 수 백 년 전 왕과 왕의 사람들이 걸었을 그 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눈 내린 궁을 구경했다. 어느 처마 밑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지켜봤다. 경복궁만큼의 웅장함은 없지만 숲과 나무, 연못, 정자, 화단이 조화를 이룬 아담한 창덕궁. 흔하디 흔한 표현이지만 눈 내리는 날의 창덕궁은 한 폭의 동양화 그 자체였다. 그 안에 머무는 동안은 화가가 무심하게 찍은 점처럼 동화되길 바랐다. 몇 개월 후 찌는듯한 폭염이 시작되면 이 순간의 공기와 기온과 분위기를 담은 사진을 꺼내 보며 더위를 식혀야겠다는 마음으로 연신 셔터를 눌렀다. 이날 찍은 사진을 다시 열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온도가 5도쯤 떨어질 테니까.


프로 배구 직관

야구를 보러 부산에 갔다. 축구를 보러 스페인 마드리드에 갔다. 농구를 보러 새벽 첫차를 타고 한 겨울 잠실 실내 체육관에 줄을 섰다. 진성 덕후라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여러 종목의 경기를 직관하며 야금야금 스포츠의 매력을 즐기는 뜨내기 팬이었다. 지난여름, 도쿄 올림픽을 통해 배구의 매력을 제대로 알게 된 후 다짐했다. 직접 경기장에 가서 배구를 보리라.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뜨거웠던 마음은 금세 식었다. 마음이 밍밍해졌을 때, 우연히 시내 번화가에 걸린 플래카드를 봤다. 매일 지나가는 길인데 딱히 의식을 하지 못했다. 우리 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배구팀의 경기 일정 정보가 담겨 있었다. ’아! 우리 동네에도 있었네, 배구팀. 일정이 맞으면 한 번 가볼까?’ 하고 슬쩍 내용을 살펴보니 딱 맞는 경기가 있었다. 혹시나 하고 아빠께 배구를 보러 가자고 슬쩍 흘렸다. 무료한 겨울을 보내던 아빠는 예상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집에서 버스로 10여 분이면 닿는 시 외곽의 체육관. 서울이 연고지인 농구나 야구, 축구팀 경기를 보러 가면 1시간 30분 이상은 길에 버리는 게 익숙했던 경기도민은 이동거리만으로 이미 만족감은 120%였다. 간단한 방역 절차를 거쳐 경기장에 입성하니 토요일인데도 이미 관객들로 차 있었다. 경기장 자체가 자그마하다 보니 선수들의 숨소리며 공을 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래 이 맛에 직관하는 거지. 2세트를 연속 따내더니 나머지 두 세트를 내주다 마지막 5세트를 가져오며 승리. 이렇게 쫄깃하게 경기를 해 주니 열광할 수밖에 없구나. 다음번에는 엄마까지 포섭해 평일 경기까지 섭렵했다. 직관을 갈 때마다 이기니 승리 요정이 된 거 같아 배구를 보는 재미가 늘었다. 배구 직관의 가장 큰 수확은 낮에 잠깐 산책을 하는 걸 빼면 TV 앞에서 시들어 가는 화초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는 부모님께 작은 취미를 만들어 드린 거다. 율동과 음악이 난무하는 경기장 응원석의 흥을 즐기고, 경기에 몰입하고, 돌아와서는 본인들 얼굴이 잡히진 않았을까 집중해서 스포츠 뉴스를 집중해 보신다. 선수의 실력과 별명, 경기의 흐름, 팀의 순위 등 대화거리도 조금 더 풍성해졌다. 평범한 일상에 배구 직관 하나를 끼얹으니 가족들 사이에 한층 더 활력이 생겼다.


‘그건 니 생각이고 ‘ 마인드 장착

취미는 잡생각, 특기는 생각 물고 늘어지기. 이런 성격의 소유자가 평정심을 갖고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조언의 옷을 입은 쓴소리나 걱정을 가장한 팩트 폭력 등등을 당할 때마다 말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머릿속에서 뱅뱅 굴린다. 분명 상대방의 입에서는 별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지레 겁을 먹고 걱정에 걱정을 더한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밤,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어지는 생각에 밤을 하얗게 새우기도 했다. 컨디션은 엉망이 되고 일상도 무너진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뚱이를 이끌고 답을 찾기 위해 책을 뒤지곤 했다.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답은 비슷비슷했다. 조언이라는 이름의 말을 굳이 다 담을 필요가 없다. 상대방의 감정까지 내가 책임질 수 없으니 원하지도 않는 말까지 담아 들고 괴로워하지 마라. 이번 겨울에도 여러 말을 들었다. 너는 이래서 이래야 해. 다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길 바라는 따뜻한 말이지만, 그중에서 걸러 듣기로 했다. 한겨울 칼바람처럼 차갑고 매섭게 잘라냈다. 필요한 건 충분히 수용하지만, 선 넘는 건 ‘말은 고맙습니다만 그건 당신 생각이고.’라는 마인드로 끊어내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을 사람들의 선 넘는 개소리를 끌어안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으니까. 몸의 근육을 채우듯 마음의 근육을 채우고 있다. 종종 찢어져서 아플 때도 있지만 자꾸 움직이고 근육을 만드는 좋은 물질들을 챙겨 먹다 보면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될 테니.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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