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 버린 나의 빡침 소화제
점심 식사 부대의 파도가 한바탕 몰아치고 난 후 1시 30분. 혼이 빠져나가기 직전까지 내달렸던 직원들도 한숨을 돌릴 그때가 조용히 식사하기 좋은 타이밍이다. 전쟁터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유독 소화가 안된다. 차라리 안 먹느니만 못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내 의지로 시간을 택할 수 없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점심시간 피크는 피해 밥을 먹는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내부가 한적한 걸 확인한 후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처음 가 보는 낯선 동네의 중국집. 외부 간판은 낡고 허름했는데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인수한 걸까? 내부만 리모델링한 걸까? 이제 음식점의 맛이 아니라 사정이 더 궁금한 나이가 되었다. 카운터에 앉은 젊은 여성은 우리가 들어서자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인사를 건넨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물병과 메뉴판을 함께 내려놓았지만 우리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그날의 온도, 날씨, 기분에는 짬뽕이 답이었다. 늦은 겨울엔 빨간 짬뽕이 필요했다.
가게 벽에 걸린 커다란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재방송 드라마를 보며 잠시 수다를 떠는 사이, 하얀 김을 폴폴 내뿜으며 짬뽕이 도착했다. 흔히 홍합으로 생각하는 까만 지중해 담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입 떠먹어 보니 진하고 감칠맛이 넘쳤다. 우연히 들어왔는데 숨은 동네 맛집을 찾은 건가? 설렘이 차오르던 찰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큼직한 오징어를 건져 씹는 순간 깨달았다. 그럼 그렇지. 바다를 달리는 타이어, 대왕 오징어구나.
언제부턴가 야들야들한 일반 오징어를 들어간 짬뽕을 찾아보기 힘들다. 고급 중식당이나 해산물이 흔한 바닷가 근처의 중국집이 아니라면 대부분 일반 짬뽕에는 두툼하지만 씹으면 턱이 빠질 거 같은 대왕 오징어가 들어가 있다. 식자재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특히 어획량이 줄어들면서 오징어는 금값이 되어 버렸다. 바다에서 갓 잡아 얼린 선동 오징어조차 짬뽕 그릇 안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사실 짬뽕만의 문제는 아니다. 떡볶이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오징어튀김도, 가슴속에 3천 원쯤은 품고 다녀야 하는 이유인 타코야끼도, 물만밥과 영혼의 짝꿍인 진미채도, 극장 앞에서 파는 버터구이 오징어도 우리가 흔히 대왕 오징어라 부르는 남아메리카 바다에서 잡힌 홈볼트 오징어가 원재료다.
누군가는 입안 가득 씹는 맛이 있어 대왕 오징어가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씹는 맛이 문제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일반 오징어와 달리 대왕 오징어는 씹으면 씹을수록 쓴맛이 난다. 교체 시기를 한참 넘긴 오래된 타이어를 씹는 것처럼 질기기만 하고 그 어떤 풍미나 식감의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다. 위장 속에서 소화가 되기 쉬울 만큼 입에서 씹어 넘기려고 노력해 보지만 내가 원하는 정도까지 씹다 보면 턱에 쥐가 날 거 같다. 남아메리카의 캄캄한 심해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넌 어쩌다 이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이렇게 인간의 입에서 방황을 하는 거니? 이제 그만 턱을 괴롭히고 위장으로 내려가렴. 잔뜩 성난 대왕 오징어를 어르고 달래 겨우 목구멍으로 밀어 내렸다.
어렵게 대왕 오징어 조각을 하나 넘긴 후, 짬뽕을 뒤적여 그 친구들을 하나씩 앞접시에 덜어 놓았다. 더는 먹을 턱 상태가 아니다. 턱의 고통을 감수하고 먹을 만큼 매력적인 맛이 아니다. 홍합을 가장한 지중해 담치와 오징어를 건져내고 나니 남은 건 양파와 양배추, 쥬키니호박, 당근이 전부다. 매운 채소 국이나 다름 없었다. 주방 너머에서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에 진절머리가 난 중국집 사장님의 한숨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다.
2천 원을 더 주고 삼선 짬뽕을 시켰다면 달랐을까? 이제 보통 짬뽕에서 억센 대왕 오징어 말고 나긋나긋한 오징어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한 걸까? 식사를 마치고 나와 얼얼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화나고, 짜증 날 때 '빡침 소화제'이자 '신경안정제' 삼아 먹어 온 짬뽕이 이제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과 대왕 오징어가 살던 남아메리카 심해 사이의 거리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