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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r 16. 2022

마음이 급할수록 시야는 좁아지니까

건전한 딴짓이 필요해



토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창문부터 열었다. 공기 속에서 날 선 겨울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봄은 봄이구나. 요즘 통 잠을 못 잔다. 환절기라 비염이 도져 숨이 안 쉬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생각이 많아서인지. 솔직히 둘 다 영향이 있겠지만 어쨌든 매일 밤 잠드는 게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질 정도다. 불을 끄고 핸드폰도 베개 밑에 묵은지처럼 박아 둔지 한참인데도 기다리는 ‘잠님‘이 찾아오질 않는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이부자리 위에서 뒤척이다 말끔히 몰아내지 못한 생각 끝이 닿은 결심은 하나였다. 아침에 일어나 날씨가 좋으면 산에 가자. 순두부 멘털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셨는지 흐리지는 않았다.  

    

눈곱만 겨우 떼고 간단히 세수를 했다. 옷장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던 윈드 재킷을 오랜만에 꺼냈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등산 장갑까지 챙긴 후 오래된 트래킹화에 발을 넣었다. 신을 때마다 ’ 여기저기 낡았으니 다음에는 새 등산화를 사야지.’ 다짐하지만 매일 신는 운동화가 아니기에 이렇게 또 신게 된다. 뚜벅뚜벅 걸어 집에서 멀지 않은 북한산 자락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역시 사람이 적지 않다. 약 2시간의 산행. 정돈된 나무 데크 길을 지나 먼지 폴폴 날리는 흙길. 이어서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 하는 험한 암릉 구간까지. 지루할 틈 없이 버라이어티 한 길들이 펼쳐진다. 넘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고, 삐끗하지 않게 발에 힘을 주고 집중해 오른다. 한걸음 한걸음 오르다 보면 숨이 턱까지 차고 얼굴이 새빨갛게 터질 만큼 달아오르면 서서히 끝이 보인다. 줄을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정상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더 오를 곳도 없다. 드디어 끝이다.

      

힘들게 올라온 정상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지저귀는 새소리, 코끝을 파고드는 청량한 산바람, 천년 묵은 화도 씻어 내릴 만큼 탁 트인 시야, 여유롭게 각자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을 기대했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시야도 흐릿했고, 공기도 텁텁했다. 산악회인지 여럿이 무리로 온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냄새를 풍기며 막걸리에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등산객들의 소음을 지우개처럼 싹싹 지워줄 무선 이어폰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켰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걱정에 이자가 붙고, 고민에 군살이 더해져 가는 시기.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 미친 X 시즌‘이다. 계절의 영향인지 상황의 문제인지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마음의 병치레를 한다. 헝클어진 마음과 머리를 정리하고 싶어 별별 짓을 다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SOS를 치기도 하고, 답을 찾아 책을 뒤지기도 하고, 당장 하지 않아도 될 단순한 잡일로 도망가기도 한다. 문제는 내가 걱정하는 것보다 분명 심각하지도 않고, 답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괴롭히는 편이다. 마음은 급하고, 그래서 자꾸 시야가 좁아진다. 그래서 별일 아닌 일에 신경질을 내고,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다. 이러고 있어 봤자 나만 갉아먹는 걸 알기에 기압이 낮은 기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럴 때는 주로 높은 곳에 올라간다. 루프탑 카페도 좋고, 전망대도 좋고, 한 줌이라도 체력이 남아 있으면 산에 간다.     


등산이 근력운동과 심폐기능을 키우는 유산소 운동 효과가 좋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내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바로 시야를 넓힐 수 있다는 점.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쫓겨 시야가 좁아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결국 이상한 선택을 하고 만다. 그럴 때는 거리를 두고 보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간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해 오르다 보면 닿게 되는 정상. 그곳에서 보이는 것들은 같은 눈높이에서 봤던 것들과 차원이 다르다. 콩만 한 빌딩, 참깨만 한 자동차, 좁쌀만큼 작은 사람들. 산에서 봐도 이 정도인데 우주에서 보면 먼지 같은 존재들이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다.       


잘하고 싶어서, 제대로 하고 싶어서,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빨리 결과를 내고 싶어서 난 자꾸만 확대경으로 들춰봤던 건 아닐까? 실제 문제의 크기보다 확대 해석한 건 아닐까? 생각이 이어져 붙은 살집에 눌려 지레 겁을 먹고 먼저 졸아든 건지 모른다. 앞서서 생각하지 말고 일단 주어진 일에만 집중하자. 오늘의 목표는 등산이었으니 일단 미션 클리어. 잠시 숨을 돌리고 내려가서 도서관에서 책을 하나 빌려서 최애 스콘이 있는 카페에 가자. 고소하고 파삭한 스콘을 한입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다가 목이 막히면 산미 없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있는 힘껏 들이켜야지. 그러면 그간 쌓인 묵은 고민들이 쑥 하고 내려갈 거다. 이렇게 쉽고 단순한 목표들을 하나씩 이루다 보면 가출한 자신감이 은은하게 쌓일 거다. 무너진 나를 바로 세워 줄 ’ 건전한 딴짓‘을 이어서 하기 위해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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