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에도 존재하는 신호등
자정에 가까운 시간, 지하철 막차에서 내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집에 닿기 전, 마지막 횡단보도 앞에서 눈을 의심할 광경을 목격했다. 왕복 6차선의 드넓은 도로 앞에 자그마한 길고양이가 주춤거리고 있었다. 밤은 깊어 캄캄하고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고 차들이 굉음을 내며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저 작은 고양이가 차에 치이는 건 아닐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지켜보게 됐다. 내 시선은 일찌감치 도로에 선 고양이에게 닿았지만, 두 발은 아직 거기까지 닿지 못한 상태. 내가 선 곳에서는 신호등이 어떤 색인지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길 위를 집 삼아 사는 고양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궁금해졌다. 잔뜩 겁을 먹었는지 바짝 선 털 뭉치의 그림자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육중한 자동차 바퀴에 자그마한 몸뚱이가 빨려 들어가는 건 아닐까 마음을 졸이며 허둥지둥 고양이를 쫓아갔다. 몇 발짝 떼지 않았을 때, 나는 알게 됐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이 도시의 고양이는 똑똑하다는 사실을.
고양이는 정확히 초록불이 바뀌자마자 내달린 거였다. 노란 불에 하나 둘 차가 정지선 앞에 멈추기 시작했고, 그 타이밍에 맞춰 어둠 속에서 나와 횡단보도 앞에 자리를 잡고 초록불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색이 바뀌자마자 익숙한 듯 횡단보도를 건넜다. 도시에 발붙이고 살려면 이 정도 인간들의 약속은 꿰차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교통사고로 고양이별로 떠나보낸 친구들을 떠올린 걸까? 내 걱정이 무색할 만큼 영리한 고양이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길고양이만큼 사람들 사이의
바뀐 신호를 알아채고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눈치가 빠르지만 대부분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온갖 것에 예민을 떨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 ’ 눈치 없음‘을 깨닫곤 한다. 대부분은 초록 불인데 빨간 불인 줄 알고 겁을 먹은 거였고, 가끔 빨간 불인데 초록 불인 줄 알고 무식하게 직진한 적도 있다. 분명 나를 향해 빨간 불, 노란 불, 초록 불 신호를 보냈을 텐데 잘 구분하지 못했다. 나의 눈치 없음을 깨달을 때마다 내 머리를 세게 쥐어박곤 했다.
신호등을 정확히 보고 건너는 똑똑한 고양이처럼 자신의 똥촉이 아닌 관계의 신호등 색깔부터 파악하는 눈이 필요하다. 차가워진 말투, 굳은 표정, 존중 없는 태도, 사라진 시선 교환. 무심코 흘려보낸 신호들을 모아 보면 관계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증거다. 다정한 관심, 사소한 배려, 오가는 물질, 잦은 눈 마주침. 무심히 지나쳤던 신호들을 모아 보면 관계에 초록불이 들어왔다는 증표다. 오늘 내 눈에 들어온 행동, 내 귀에 닿은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본다. 어느 순간에는 초록불이었고, 또 다른 순간에는 분명 빨간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