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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05. 2022

목련 삭발

있을 때 잘 하자, 후회하지 말고.

    

늦은 밤, 물이 한 바가지 들어간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버스에서 내렸다. 이제 5분만 걸으면 집이다. 코너를 돌아 편의점이 있는 골목으로 꺾으면 이맘때쯤이면 달력을 보지 않아도 봄이 왔음을 알게 해주는 증표 같은 존재가 우뚝 서 있다. 본격적인 주택가가 시작되는 골목의 단독주택의 빨간 벽돌담 위로 머리를 빼꼼 내민 목련나무다. 하얀 목련 꽃잎이 커다란 눈송이처럼 펑펑 쏟아지는 걸 보면 봄의 한가운데 겨울이 다시 온 기분이다. 칼바람이 쌩쌩 부는 매서운 한 겨울이 아니라 따뜻한 겨울. 목련은 도시에서 만나는 봄꽃 중 벚꽃 전에 만날 수 있는 성급한 녀석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상했다. 예년이었다면 일찌감치 목련 잔치를 하고도 남을 때인데 도통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해가 떠서 환할 때에서야 목련나무를 마주하고 그 미스터리가 풀렸다.      


내가 이 나무를 본지도 NN 년.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파격적인 헤어스타일로 변신했다. 동물원의 기린이 먹이를 받아먹으려 긴 목을 내밀 듯 담장 너머로 탐스러운 목련 꽃을 얹고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만끽했던 크고 긴 가지는 없다. 두발 자유화가 없던 시절 까까머리 중학생처럼 짧게 볼품없이 잘려 있었다. 그저 최소한의 생명만 유지할 만큼 나무 몸통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가지를 쳐내 버렸다. 그 와중에도 무서운 생명력은 정수리 부분에 목련 꽃 몇 개를 열심히 피워내고 있었다.     


엄마께 버스정류장 근처 목련나무가 있는 집은 왜 그렇게 사정없이 가지를 쳐냈는지 사연을 듣게 됐다. 지나는 사람은 그저 봄의 낭만을 즐기면 되지만 관리를 해야 하는 집주인에게 봄만 되면 꽃을 내뿜은 목련 나무는 골칫거리였다. 떨어지면 꽃잎이 바람결에 날아가지 않는 보통의 꽃들과 목련은 차원이 달랐다. 아이보리빛 꽃잎은 나뭇가지에 있을 때는 단아하고, 청초하지만 땅에 떨어지는 그 이후의 시간은 쓰레기에 가까웠다. 우아하게 뽀얀 꽃잎은 꽃송이째 떨어지는 법이 없다. 꽃잎이 하나씩 흩어지고, 갈색으로 시든다. 아무리 부지런히 나무 아래를 치워도 지저분해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목련 꽃이 피는 봄이 오기도 전에 일찌감치 목련꽃이 필 가지들을 잘라냈다. 예전처럼 집주인의 기력이 좋았다면 별일 아니었겠지만, 이제 떨어진 목련 잎을 청소하는 것조차 버거운 사정이 목련나무 소유자에게 있었다.      


매년 짧은 봄을 만끽했던 숨은 동네 명소가 사라져 아쉽다고만 생각했다. 인정머리 없게 잘라낸 목련나무 가지를 보며, 주인은 성질머리가 고약한 사람이 아닐까? 추측했다. 나는 관리의 의무는 없고, 주인의 수고로움을 먹고 자란 목련을 그저 눈으로 즐기기만 하면 되는 구경꾼일 뿐이니까. 매년 풍성한 하얀 목련 꽃이 피는 봄을 제외한 여름, 가을, 겨울에 그 나무가 있는지도 모른 채 350여 일을 보내는 무심한 동네 주민이니까.  

     

봄이 오면 피는 목련을 보며 그저 자연의 이치라고만 생각했다. 따뜻해지면 꽃을 피우고, 여름이 되면 잎이 푸르러지고, 가을에는 다 떨구고, 추운 겨울에는 움츠려 있다가 다시 봄이 되면 봉오리에 살을 찌우니까. 때가 되면 응당 이루어지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피는 꽃은 없었다. 마당 한쪽에 땅을 내어 주고, 물을 주고 떨어진 꽃과 낙엽을 치워주고 종종 비료도 줬을 주인의 수고’‘ 있었다.     


내가 당연하게 받아 왔던 것들을 떠올려 봤다. 따뜻한 배려, 다정한 말, 세심한 관심, 은은한 응원 등등 내가 무너지지 않고 바로 설 수 있게 해주는 많은 것들은 그냥 나오는 게 없었다. 적지 않은 에너지를 써서 챙겨주고, 신경 써 준 이들의 수고로움이 있었다. 나라는 꽃을 피워주기 위해 기댈 어깨도 내어 주고, 커피도 수혈해 주고, 떨어진 기운을 끌어올려주고, 에너지 뱀파이어들을 치워주고, 종종 맛있는 것도 사준 사람들이 있었다. ’바리깡‘으로 사정없이 밀어 버린 사춘기 중학생 머리처럼 못생긴 마음이 들 때는 ’ 삭발한 목련나무‘를 떠올려야지. 예전의 그 탐스러운 자태가 될 때까지 수많은 시간, 비바람을 맞으며 혹독한 시간을 견뎌야 하니까. 잃어버린 후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 하자는 진리를 오늘도 가슴에 깊게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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