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Apr 07. 2022

어김없는 중년의 신호

벼락치기식 행복을 위하여 

      


뭘 하나 사려면 몇 번이고 고민하는 스타일이다. 쇼핑몰 순례를 하고, 실물을 보고, 가격 비교를 하고, 정말 내게 필요한 건지 고심한 후에야 결제한다. 이렇게 시멘트로 입구를 막은 듯 굳게 닫혔던 지갑이 한 곳을 향해 활짝 열리고 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존재는 바로 등산 용품. 인간이 중년이 됐다는 신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자연스레 개수가 늘어가는 등산용품이라고 했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야 말았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는 한낱 초보 중년일 뿐이다. 2030 MZ 세대 사이에도 등산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팬데믹 시대의 유행이고 그 물결에 올라타기엔 탄력도 양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인정해야 한다. 난 그저 노화의 섭리를 받아 들일 나이다.      


7년 전에 산 낡은 트래킹화 하나로 서울 둘레길도 완주하고, 제주 올레길도 걷고, 한라산도 여러 번 오르며 버텼다. 그러던 내가 이번 봄에 새 등산화를 시작으로 등산 스틱, 무릎 보호대, 등산 가방까지 <등린이 4종 세트>를 완성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지출이었다. 2022년 처음 등산을 가기 전까지.       


이맘때쯤이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답답증을 풀어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하지만 예전처럼 맨몸으로 부딪히기엔 내 몸이 낡고 닳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어진 체력과 기능들을 보완해 줄 장비들이 필요했다. 좋아하는 걸 오래 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돈도, 마음도.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버거워 산에 오를 때는 물 한 병을 제외하면 딱히 짐을 챙겨 가지 않았다.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틀어 놓고 도란도란 떠드는 수다를 들으며 차분하게 한걸음 한걸음 올라 물 한 병을 비우고 돌아오는 게 내 등산 루틴이다. 동행이 있다면 내려와서 치맥이건 곱창에 소맥 또는 파전에 막걸리를 먹는 게 편했다. 육해공을 망라하는 음식으로 ’ 정상 레스토랑’을 차리는 사람들을 흘깃 보며 살짝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힘들게 이고 지고 갈 마음도 없고, 체력도 없고, 준비할 의지도 없었다. 그러니 내게는 물 한 병이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몇 주 전, 비 온 다음 날 산에 갔다가 물이 덜 빠져 진흙탕이 된 산길을 올랐다. 낡은 트래킹화는 엉망이 됐고, 더 이상 그 녀석에게 신세를 질 수 없었다. 이별할 때가 온 거다. 산에서 내려온 후 백화점에 들러 시착해본 후 공식 온라인 스토어에 주문을 넣었다. 신규 가입 회원 쿠폰을 먹여 한결 가벼운 가격의 새 등산화를 얼마 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낡은 트래킹화만큼이나 낡기 시작한 무릎을 보완해 줄 등산 스틱과 무릎 보호대도 주문했다. 집에서 나와 산까지 가기 전, 등산 스틱과 보호대를 넣어 둘 가방도 필요했다. 추가 주문한다. 정상가 대비 60% 이상 저렴하게 합리적 쇼핑을 했다. 하지만 이건 분명 충동구매였다. 3월 쇼핑 계획표에 등산용품은 없었다.      


나의 등산 기본 템인 물과 등산 스틱, 보호대를 넣기 위해 마련한 가방. 당일치기 산행만 하니 15L짜리 작은 걸 샀는데도 저 세 아이템만 넣고도 공간이 남았다. 여유가 생기면 뭔가를 밀어 넣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 등산로 초입의 분식집에서 김밥을 포장했다. 무거운 짐은 질색이라 간식 하나 안 챙겼었는데 김밥이라니. 가방이 잘못했다. 잘못했어. 좀 더 작은 사이즈가 있었다면 그걸 샀어야 하는 건 아닐까? 살짝 후회하며 가방을 어깨에 멨는데 김밥의 무게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김밥을 넣기 전과 후 전혀 차이가 없었다. 아. 이래서 장비가 중요하구나.      


새 장비‘빨 ‘ 덕분인지 애초에 험한 산이 아니어서인지 기대했던 두 시간의 산행은 싱겁게 끝났다. 헛헛한 마음을 채우려 정상석 근처 바위 위에 손수건을 깔고 산 아래에서부터 지고 올라온 김밥을 펼쳤다.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남들처럼 ’ 정상 레스토랑’을 나도 차렸다. 주말이라 사람 북적이는 게 싫어 새벽부터 올라온 탓에 평소라면 눈도 뜨지 않을 시간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주말 아침의 도시를 내려다보며 김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등산객을 수없이 봤는지 이름 모를 산새들이 부지런히 주위를 맴돌며 밥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들의 주목을 받으며 야무지게 김밥을 먹었다. ‘산에 올라 정상에서 김밥을 먹는다’는 오늘 세워둔 목표는 오전 8시 30분에 미션 클리어했다. 먹은 흔적을 정리하고 산에서 내려오니 오전 10시. 평소 주말이었다면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할 시간에 하루치 목표를 달성하고 나니 남은 주말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완벽한 결과를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철저한 준비를 위해서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생각은 거대한 기대를 낳는다. 거대한 기대는 대부분 실망으로 돌아온다. 내가 가진 것들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유는 차고 넘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릿속에서 생각만 뱅뱅 굴리며 온갖 시뮬레이션을 하다 에너지를 다 소진하곤 했다. 머리로는 스티브 잡스 뺨도 후려치고, 하루키 멱살도 잡았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잡생각으로 똘똘 뭉쳐 보통의 삶조차 겨우겨우 쫓아가는 신세다.        


산에 오르며 세운 목표는 단 하나, 생각 덜어내기다. 잡생각을 할 여유란 없다. 그저 올라야 할 곳이 있고, 근육을 쥐어 짜내 한 걸음 한걸음 오르다 보면 정상에 닿는다. 탁 트인 전경을 보며 땀을 식히고, 물 한 모금이건 김밥이건 배를 채우고 다시 내려오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늦잠으로 게으름을 부렸을 시간에 뭐라도 한 기분. 벼락치기식 행복감이 차오른다. 대단한 계획이나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기대감이 낮다. 그러니 만족감은 내려갈 일이 없고 그저 오르기만 한다. 복잡한 생각 속에서 길을 헤매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벼락치기식 행복으로 하루하루를 채우기로 했다. 크고 완벽한 행복을 좇느라 불만 덩어리로 사는 것보다는 분명 나은 선택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목련 삭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