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허니 즉석 떡볶이> 방문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떡볶이에 대해 밀떡파인가? 쌀떡파인가? 난 확신의 후자다. 밀가루보다 쌀이 뭐라도 건강에 좋을 거 같다는 선입견이 제일 크고, 다음은 식감이다. 씹었을 때 밀떡이 입안에서 통통 튀고 감각적인 라임 뽐내는 래퍼 같다면 쌀떡은 꾸덕하면서도 탄력이 살아 있는 원숙한 R&B 보컬 같다. 오래 끓여 양념이 깊숙이 밴 쌀 떡볶이를 먹으면 쌀떡 떡볶이가 내장을 훑어 내려가며 오래 묵은 스트레스를 싹싹 지워준다. 마치 지우개처럼. 그래서 떡볶이를 먹을 때 밀떡과 쌀떡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고민은 사치일 뿐. 나의 답은 언제나 쌀떡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즉떡, 즉 즉석 떡볶이를 먹을 때만큼은 밀떡을 거부할 수 없다. 아직 떡볶이 수련의 역사가 짧은 탓인지 쌀떡이 든 즉석 떡볶이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과연 이 세상에 쌀떡이 들어간 즉석 떡볶이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 글을 쓰다 궁금해져 검색해 보니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역시 쌀떡에 진심인 분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역시 배우신 분 만세!) 아마도 밀떡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만기도 하고, 끓이면서 먹는 즉석 떡볶이의 특성상 오래 끓이면 퍼져 버려서 쌀떡이 아닌 밀떡을 사용할 거로 추측할 뿐이다.
혈중 즉떡 농도가 바닥을 쳤던 얼마 전, 지인들을 이끌고 광화문의 어느 즉떡집으로 향했다. 원래 1순위는 삼청동의 오래된 즉떡집이었다. 하지만 주말 저녁, 감히 상상도 안 될 웨이팅을 견디기에 우리의 인내심도 관절 상태도 무리였다. 급하게 인터넷에서 검색해 찾게 된 즉떡집. 기대감 불안감 반을 안고 전화부터 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인터넷에 올라온 영업시간과 실제 상황이 달라 굳게 닫힌 문만 보고 돌아섰던 아픈 기억이 바로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 확인 전화를 했는데 다행히 ‘오늘 영업을 한다’는 반가운 목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분명 처음 가는 곳인데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시끌시끌한 소음은 그곳의 즉떡맛에 대한 기대감이 풍선처럼 부풀게 했다
광화문역 코앞 먹자골목의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는 <허니 즉석 떡볶이>. 각자 떡볶이를 먹어 온 내공만 합쳐도 도합 100년을 넘을 떡볶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터벅터벅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작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에는 각자 냄비에 머리를 박고 즉떡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바로 직전, 경복궁역에서 광화문까지 오는 동안 곳곳을 헤집어 놓은 복잡한 공사장, 주말을 즐기려 쏟아져 나온 인파, 각종 시위로 생긴 소음으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가게 문을 여는 순간 조금 전까지 머리와 귀를 못살게 굴던 소음들이 싹 사라졌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켠 듯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감이 몰려왔다. 직접 개발해 숙성시킨다는 소스, 당일 생산된 밀떡, 매일 아침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직접 끓인다는 육수, 공장이 아닌 직접 손으로 즉석에서 말아 낸다는 꼬마김밥 등 벽에 붙은 안내문에서 즉석 떡볶이를 향한 애정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빛의 속도로 주문하고 떡볶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좀 의외였다. 10대 후반의 남학생 둘, 20대 초반의 여학생 셋, 머리에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노년의 커플, 방금 운동을 마치고 온 듯 운동복 차림의 30대 혼밥남. 접점 하나 없는 사람들이 각자의 떡볶이를 즐기고 있었다. 떡볶이 하면 10대, 20대 여성들의 전유물 같은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곳은 남녀노소를 망라한 전 세대가 즉석 떡볶이 하나로 화합을 이루고 있었다.
세대 통합을 이룬 떡볶이의 맛은 어떨까? 궁금했다. 얼굴 가득 피곤함이 쩔어있는 직원은 최선을 다해 친절을 쥐어 짜낸 다정한 목소리로 먹는 법과 주의점을 설명하며 가스버너 위에 냄비를 올려놨다. 수북하게 쌓인 파채 아래로 삶은 달걀, 깻잎, 양배추, 라면, 어묵, 튀김만두, 쫄면, 떡볶이가 짜장이 섞인 듯 검붉은색 소스가 퍼져가는 육수 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보글보글. 떡볶이가 익기를 기다리는 이 시간은 즉떡 먹기의 최대 고비다.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가장 괴롭다. 퍼진 것보다 꼬들한 편을 좋아해 먼저 라면부터 냉큼 건져 먹었다. 면발에 밴 소스 맛이 독특했다. 가게 이름에 ‘허니’가 들어가서 그런가? 달달했다. 그렇다고 설탕의 기분 나쁜 단맛은 아니었다. 분명 ‘신라면‘ 정도의 매운맛이라고 했는데 매운맛보다는 부드러운 단맛이 가득했다. 아마 넉넉히 넣은 채소에서 우러난 단맛일까? 아니면 설탕류가 아닌 다른 감미료일까? 물음표를 머릿속에 살살 굴리며 살짝 익은 채소를 곁들여 적당히 익은 밀떡도 건져 먹었다. 탱글하게 씹히는 밀떡의 탄력감. 씹을 때마다 달달하고 짭조름한 소스가 어우러져 가히 즉떡의 화룡점정이었다.
확신의 쌀떡파인 나도 즉떡의 밀떡 앞에서는 속수무책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다. 4시간 전, 중식 코스 요리를 먹었는데도 무작정 들어가는 즉떡. 가히 마법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즉떡의 필수 코스이자 한국인의 디저트, 볶음밥을 못 먹은 게 아쉬울 뿐이다. 다음번에는 제대로 배를 비우고 와서 즉떡 풀코스를 달성하리라 다짐하며 가게를 나왔다. 나에게는 이렇게 또 차곡차곡 스트레스가 적립될 때 도망칠 피난처가 하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