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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n 09. 2022

평생 보호자였던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는 일

 받아들여야만 하는 전세역전

      

몇 달 전부터 엄마의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동네 병원에서 진료 후 처방받은 형형색색 약을 한 움큼씩 먹었는데도 딱히 차도가 없었다. 기침 때문에 잠까지 설치는 엄마를 보며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집 근처의 대학 병원 예약을 잡았다. 최대한 이른 날짜로 잡은 예약일도 2주가 넘은 때였다. 그나마 코로나19 여파에 새로 생긴 병원이라 이 정도지 원래 다니던 다른 대학병원이었다면 수개월은 걸렸을 일이란 걸 안다. 엄마의 기침 소리로 눈을 뜨고 눈을 감는 날들을 며칠 더 보내고 드디어 예약일이 밝았다. 다행히 스케줄을 비울 수 있었고 한사코 혼자 가도 괜찮다는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기로 했다. 처음 가는 곳이기도 했고, 차갑고 거대한 그곳으로 엄마를 혼자 보내는 게 영 내키지 않아서였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짧지 않은 그 시간을 새로 핀 꽃의 사정이며, 비가 안 와 말라버린 개천 상황에 여기 사는 동물 친구들의 집평수가 줄어서 어쩌나 하는 걱정 등등 도란도란 수다로 채우며 병원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병원 실물은 멀리서 봤을 때보다 거대했고, 냉랭했다. 대부분의 대학 병원이 그렇듯 복잡한 절차와 기다림 끝에 드디어 담당 교수를 만났다. 나보다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젊은 교수는 차분히 문진 했고, 만성기침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며 몇 가지 검사를 권했다. 다시 수납하고, 접수하고, 대기하기를 한참. 병원 안을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엄마의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을 채웠다.       


일흔 살이 넘은 엄마는 병원에 오가는 환자 중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같은 짧둥하고 오동통한 팔에 링거를 꼽은 채 반짝이는 병원 로비를 놀이터 삼아 내달리는 아이. 붕대로 다리를 감싼 채 휠체어에 앉아 어디론가 가는 청년. 손으로 허리를 짚고 부른 배를 내밀고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는 여성. 배우자의 손을 꼭 잡고 간호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얼굴 가득 검은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한 중년의 남성. 지팡이에 의지하고서도 한 걸음을 내딛기 어려워하는 백발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등 각자의 삶에 드리워진 병마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단연 내 눈에 가장 많이 걸린 사람은 나처럼 부모님을 모시고 온 내 또래의 자녀들이었다. 분명 평생 보호자였던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 병원에 왔다. 요즘 병원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기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만 디지털 세대가 아닌 부모님들이 어려워할 접수, 진료, 수납 절차를 대신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미로 같은 병원 내부의 길을 찾는 인간 내비게이션, 때로는 의료인들의 전문 용어를 풀어 설명해 주는 통역사, 때로는 활동 보조인, 때로는 매니저가 되어 차후 일정을 체크하고 이동을 도왔다.  

    

엄마가 혼자 여기에 왔다면 얼마나 헤맸을까? 여기저기 물어보고 헛걸음을 했을 엄마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분명 친절한 간호사와 자원봉사자들이 상주하고 있지만 넘치는 환자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내게는 엄마가 1순위지만 그들에게 그걸 바라기는 무리였다. 엄마도 무수한 환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 주사 맞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던 나는 병원에 간다는 소리를 들으면 ‘이불 뒤집어쓰고 그냥 죽겠다 ‘고 눈물범벅인 얼굴로 악다구니를 쓰며 엄마의 가슴에 자주 대못을 박는 어린이였다. 잠잘 시간도 부족할 만큼 빠듯하게 살던 그 시절의 엄마에게 얼마나 속 뒤집어지는 일이었을지 보호자가 되고 나니 알겠다.    

  

이번 병원행이 아니었어도 나는 평생 내 보호자였던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어른이 되는 만큼 부모님은 노쇠해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변화다. 집 밖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다. 병원에서 수술이나 검사를 위한 동의서에 사인하는 일은 물론이고 관공서나 은행, 공항, 여행지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낯선 곳에 가면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다치지는 않을까? 화장실에 가고 싶진 않을까? 목이 마르진 않을까? 배가 고프진 않을까? 다리가 불편하진 않을까?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바짝 날이 서서 두 분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대부분 인생의 짬바가 쌓인 분들이니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하시는데 내 마음이 불편해서 자꾸 극성스러운 보호자가 된다.      


은은한 복잡함이 내려앉은 평일 오전의 대학 병원. 보호자 없이 혼자 접수와 진료, 수납하는 백발의 어르신을 봤다. 굳은살 때문인지 잘 먹히지 않는 접수용 터치 패드도, 복잡한 병원의 안내도도, 지루한 기다림도, 어려운 의학용어를 곁들인 설명 듣기도 오롯이 혼자의 몫이었다. 어르신께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함께 오지 않았다면 분명 엄마도 저 어르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저 일들을 엄마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그제야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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